미완성글쓰기클럽 2기
안녕하세요, 미완성글쓰기클럽 2기 여러분.
아래의 규칙을 확인해 주세요.
세션마다 메일로 찾아가니 메일함을 확인해 주세요.
진송 드림
세션1: 6월 7일까지
글감 문장이 글의 첫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써 주세요.
세션3: 6월 11일까지
세션4: 6월 14일까지
완성글 등장~ 새글감 등장~!
답글을 다른 글에 잘못 올리셨을 경우에 할 일
먼저, 상황을 답글이나 작성 후기에 써 주세요. (e.g., 원래 ~~~글인데 잘못 올렸어요.)
그후, 제게 메일로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제가 삭제 후 원래 스레드에 올리겠습니다.
늦게 메일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땐 아래의 절차를 따라 주세요.
원래 본인 순서인데 누가 잘못 올렸을 경우에 할 일
1. 동일 글감으로 이미 쓰여 있는 경우 -> 뒤를 이어서 써 주세요
2. 다른 글감 내용이 잘못 달려 있는 경우 -> 잘못 올라간 내용은 넘어가시고, 원래 연결해야 하는 내용에 이어서 써 주세요.
저의 사전 공지 없이 세션2에 동일한 이슈가 발생한 관계로,
세션2는 전체 출석 인정하겠습니다. :)
260610.Updated.
세션5: 6월 16일까지
세션6: 6월 18일까지
순서 조금 바뀌었어요. 역순이 된 셈이에요~~!
세션7: 6월 21일까지
한 주 남았습니다... 두두둥...
세션8: 6월 23일까지
새글감이 많아용~~
세션9: 6월 25일까지
세션10: 6월 28일까지
보완글쓰기: 7월 2일까지
미완성글쓰기클럽2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책자 받으시는 분들의 경우, 책자는 약 한 달 정도 후 양식에 써주신 주소로 배송됩니다.
잊고 계시다가 선물처럼 만나주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진송 드림















[작성후기 와글와글]
답글삭제이곳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눠 주세요.
매번 순서로 주어진 글감문장에 대해서만 글을 쓰시면 됩니다. 한 번에 모든 글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혹여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여요.
삭제나가는 곳이 어디에 있지?
답글삭제고소한 튀김소보로 냄새와 달콤한 망고시루 케이크의 비쥬얼에 홀려 줄을 선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양손 가득 묵직한 빵 봉투를 들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대한 인간 파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었다.
삭제트레이를 높이 든 사람들, 번호표를 부르는 직원들의 외침, 그리고 끝없이 밀려드는 외지인들 사이에서 빵집을 나갈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대전에 오면 빵만 사고 바로 기차를 타려 했던 야무진 계획은 이미 무너졌다.
"악! 밀지 마세요!"
앞쪽에서 누군가 중심을 잃었는지, 연쇄적인 파도처럼 거대한 압력이 내 등 뒤를 사정없이 덮쳤다. 억, 하는 신음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왼손에 든 묵직한 망고시루 상자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었다.
거의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매장 밖으로 겨우 탈출했을 때는 이미 진이 다 빠진 후였다. 한 손에는 무거운 망고시루 끈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고소한 냄새가 풀풀 나는 튀김소보로 봉투를 든 채였다. 매장 앞은 여전히 인산인해라, 나는 숨을 돌리기 위해 바로 옆에 연결된 전통시장 골목 안쪽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이제 기차 시간 얼마나 남았지?"
숨을 고르며 자연스럽게 자켓 오른쪽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늘 묵직하게 잡혀야 할 매끄러운 기계의 촉감이 없었다. 손가락 끝이 텅 빈 안감만 슥 긁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왼쪽 주머니, 가방 속,
심지어 빵 봉투 안까지 뒤적였지만 없었다. 스마트폰이 사라졌다.
그 안에는 대전역으로 가는 KTX 모바일 승차권은 물론이고, 지갑 대용으로 쓰던 카드와 신분증까지 전부 들어있었다. 아까 그 지옥 같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혔을 때 떨어뜨린 걸까, 아니면 작정하고 소매치기를 당한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며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2026년에 스마트폰과 카드 없이 사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한 사회인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원시인이 되어버렸다. 내가 정신줄을 놓고 있는 와중에도 내 망고 시루는 녹아간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른답게 눈물을 삼키며 빵집으로 돌아가 보는 것뿐. 양손에 들린 빵들을 이고 지고 가게로 들어서서 직원처럼 보이는 아무나 붙잡고 분실물이 없느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난감한 웃음뿐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통화 한 번만 할 수 있게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니, 직원분이 마지못해 본인의 핸드폰을 건넸다.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내 번호를 눌렀다. 수신음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삭제“이 핸드폰 주인분이세요?”
네네. 맞습니다. 저 맞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흘러온다.
*다른 곳에 올리셔서 수정 게시
반가운 목소리에 냅다 대답했다.
삭제“네네! 제가 주인인데요! 혹시 어디 계세요?“
“여기.. 어디라고 설명해야 하지?”
전화기의 주인은 다소 난처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가 어디 역인지, 어느 가게 옆인지 쉽게 설명해주면 될 텐데. 무엇이 어려운 거지? 빨리 핸드폰을 찾아서 기차를 타야 하는 마음에 망설이는 상대의 전화를 기다려줄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한번 더 물어야 했다.
“제가 시간이 급해서.. 혹시 어디로 가면 될까요?”
”사실 제가 지금 이미 기차를 타버려서요.. 한 20분 전에 출발해서 지금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네요. 다음 정차역이 어디지..? 한번 확인해볼게요. 일단 이거는 부산 쪽으로 가는 기차긴 한데요.“
그의 난처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기차라니.. 그냥 택시 한번 타면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핸드폰이 부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니. 빵 하나 먹자고 왔는데 이쯤이면 전국 투어를 하게 생긴 셈이다. 곤란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핸드폰을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일단 부산으로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을 때였다.
"... 제가 다시 가게로 갈께요!"
삭제어라? 내가 생각했던 경우의 수에서 나오지 않았던 말이 이어져서 순간 뇌가 움직여야 하는 것을 까먹은 것 같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방법이 딱히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다행히 제가 조금 여유롭게 움직인 것도 있고, 때마침 살까말까 하다가 안사고 와서 후회되는 빵이 있기도 하고! 대신 가장 빠르게 올라가는 대전 가는 기차가 그렇게 바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기다려만 주신다면 제가 가게 쪽으로 갈께요. 어떠실까요?"
정말 너무 염치없고 미안한 제안이었지만 지금 나에게 다른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과 지갑이 없는 건 진짜 갓난아기보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정말 너무 죄송하지만... 그럼 제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어떻게든 기다리고 있을께요...."
"네네, 그럼 가게 앞에서 기다려주세요. 아마 이게 저희가 하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 연락일 것 같은데 그래도 마감하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네요."
꽤나 오래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핸드폰을 빌려준 직원분한테도 고개를 몇번이고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몸을 돌렸다. 일단 한 차례 해결이 됬다는 안도감과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아득함이 공존해서 덮쳐왔지만 우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테이블에 얼른 짐을 놓고 앉아야 했다. 정말이지 온 몸에 힘이 없었다. 한쪽 의자를 빼서 지금으로선 정말 짐짝이 따로 없는 망고시루와 튀김소보로를 내려놓고 다른쪽 의자를 빼서 주저 앉았다. 정말 주저 앉아버린게 맞았다. 아, 나가서 하늘 한번 보고 와야겠다. 심호흡도 해야겠다. 나가는 곳이 어디에 있지?
다시 태어나고 싶어.
답글삭제"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뭘로 태어나고 싶어?"
삭제"나는 부잣집 고양이로 태어날거야."
"왜?"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하고 싶을 때 나와서 꼬리 한번 흔들어 주면 너무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츄르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다가 햇볕이 정말 잘 드는 실크 러그 위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누리는 삶이지 않을까? 그런 존재에게 무한히 사랑도 주는 주인도 있다면 더한 삶이 있을까?"
어느 선선한 저녁,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무심코 한 친구가 던진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는 생각을 무심코 하게 되는 시간들이 있다. 우스겟스러운 생각일 수 있지만 이 생각의 답을 고민하게 될 때 수 많은 전제 조건이 붙게 된다.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이더라도 같은 성별이 아니라면?' …
이런 끝없는 조건들을 붙이고 떼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결국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만다.
블로그 관리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삭제으으 피곤해. 알람 소리가 오늘따라 더 세차게 울리는 느낌이다. 평소와 다르게 더 세고, 더 강렬하다. 또 출근이라니. 아침은 언제나 힘들다.
삭제타탁, 탁, 탁. 늘 그랬던 대로, 평소처럼 알람을 끄려는데 평소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팔이 짧아진 기분이다. 이상하다. 이쯤이면 닿아야하는데….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알람시계까지는 가지도 못한 채, 침대 위만 탁, 탁 치기를 몇 번. 감았던 눈을 떴다.
정말 이상하네. 아침이라 그런가. 시야도 평소랑은 다른 것이, 뭔가 더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광각 렌즈를 단 것처럼 주변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읊조리며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비볐을 뿐인데.
이게… 뭐야…? 내 손이 왜 이렇지.
삭제손엔 북슬북슬 얼룩무늬 털로 가득하다. 그리고 내심 탐냈던 발톱도 날카롭게 달려있다. 설마 그러면 꼬리도 있는 것일까? 인간에겐 없었던 꼬리의 감각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야 꼬리를 흔들 수 있지. 몸의 어떤 부분을 의식하고 움직인 적이 없는 터라 낯선 감각이 온몸을 감싼다. 한 걸음 앞으로 몸을 옮겨보면 뭔가 낯설게 따라오는 솜뭉치가 있다. 완벽한 고양이가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부잣집 고양이가 되고 싶다, 열심히 상상한 것과 동일하게. 그런데 알람이 울린 거라면, 혹시 부잣집 고양이로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내 몸만 고양이로 바뀐 건가? 다시 태어난다면 ‘부잣집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답에서 방점이 찍혀 있던 건 부잣집이었는데. 아마 기도를 처음부터 들어주신 게 아니라 반만 들어주신 건가. 이 반쪽짜리 기도를 갖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네, 역시나 이 공간은 지겹도록 익숙한 우리 집이다. 얼마 전 애인이 놀러온다고 해서 요즘 sns에서 유행하는 컬러감의 패턴 이불을 큰맘먹고 장만했는데, 그 패턴 위에 익숙하게 앉아있다. 고양이가 되고 나서도 이 촉감은 여전히 부드럽긴 하군. 몸을 한번 흔들 때마다 이불엔 털이 살짝씩 묻어난다. 내가 고양이가 되었으니 그러면 이 집의 주인은 누가 되는 거지. 나 혼자 사는 집인데 냅다 내가 고양이가 되어버렸으니, 누가 나를 돌봐주겠는가. 당장 우리 집에는 고양이 사료도 없고 당장 오늘의 끼니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길 바란 건 아니었어. 원래 영화를 보면 어떤 극적인 계기로 인해서 영혼이 바뀐다거나 하던데. 갑자기 번개를 맞는다든지 같은 것들. 나는 그런 일도 없었는데. 잘 자고 일어났더니 영문도 모르게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그런 사례는 나오지 않겠지. 하긴 지금 나에겐 검색할 수 있는 손도 없으니. 다행히 그래도 이 시대에는 음성인식이라는 게 있다. 나 아직.. 사람 말을 할 수 있을까? 용기내어 소리를 내본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다. 나는 사람 말을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채로 그저 몸만 고양이가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으면 뭘로 태어날꺼야?'는 그냥 행복한 상상이었지... 이게 현실로 일어날 줄은 정말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상상이 이루어졌다... 꿈이지 않을까? 다시 잠을 자자. 차분히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속절없이 계속 흘러간다.
삭제"제길... 자, 침착하자. 뭐부터 해야하지? 뭘 할 수 있지? 으아아아아아..."
그 와중에 몸은 본능적으로 햇볕이 드는 창문 앞으로 이끌렸다. 출근? 못하지. 출근을 못한다는 전화? 는 더더욱 못하지. 좋은데? 아니지. 핸드폰을 못하니까 배달음식을 시켜먹지도 못하잖아? 그럼 그냥 일단 오늘 하루는 햇볕에 늘어진대로 누려보자. 실크 러그, 맛있는 츄르, 나를 반기는 주인은 없지만 고양이로 변한 지금 나였으면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냥 해보자. 그러고 보니 마음 한 켠에 미뤄뒀던, 쌓아둔 채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뜻밖의 여유를 갖게 된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곤란해지고 있다.
답글삭제오늘 안에 이 장면을 찍어야 하는 사실은 명확했다. 완벽한 농도로 날씨가 흐린 날이었고 한바탕 축제가 끝난 터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점심부터 삼겹살을 먹은 탓인지 배우들의 컨디션도 좋은 상태였다.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깝게 세팅되는 것은 천운이 도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완벽해질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대자본 명감독의 영화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점심에 삼겹살로 분위기낸 건 좋은데, 이러면 저녁 먹을 비용이 부족하다니까요. 최대한 저녁 먹기 전에 촬영을 끝내서 비용을 절약합시다, 밥 먹는 거 갖고 치사하게 뭘 그래, 그러면 저녁은 선배님이 쏘실 건가요, 이런 대화가 수군수군 들리는 현장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적당히 아닌 것도 흐린 눈으로 넘어가야 했고 적당히 좋은 것은 대단히 좋은 것처럼 박수갈채를 보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촬영을 시작해도 모자란데. 왜 이렇게 침묵 속에서 눈동자들만 굴리고 있는 것인가.
삭제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더위에 지쳐 생기를 잃은 두 사람이 대낮부터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먹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원래 등산 후 맛집으로 유명한 해물파전 집을 섭외할 예정이었으나 적당히 햇살이 들면서 야장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가게에서는 섭외를 거절당했다. 이미 손님이 많아서 굳이 홍보를 안 해줘도 된다나. 우리 영화를 보고 가게를 방문할 정도의 열혈 팬은 한 자리 수로도 모자랄 텐데, 자조적인 생각을 했지만 섭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겨우 차선책으로 섭외한 가게는 두부김치가 유명한 곳이었다. 옆 테이블을 엿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메라와 조명을 세팅하고 적당히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차콜 티셔츠의 그래픽이 멋스러웠으며 방금 나온 두부에서 풍기는 김이 제법 식욕을 자극했다. 좋다, 이대로만 촬영하면 되겠다 싶어 카메라 롤을 외친 순간, 배우 하나가 손을 들었다.
“혹시 이 김치에 새우젓 들어갔어요?”
대한민국에서 새우젓 안 들어간 김치 찾는 게 더 어렵지 않나. 당연히 새우젓으로 시원한 감칠맛을 잡았겠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 사장님은 촬영 시작한다고 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대충 촬영 먼저 하면 안 되냐고 구슬려봤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새우 알레르기가 있어서 새우젓 들어간 김치는 절대 먹을 수가 없다고. 가까스로 연락이 된 사장님에게 문의했더니 배추김치, 파김치, 갓김치, 겉절이 등 그 가게에서 제공하는 모든 김치에 시원하게 새우젓을 가득 넣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김치 빼고 두부만, 막걸리만 먹으면 되잖아. 그건 또 단순하고 아무거나 잘 먹는 털털한 캐릭터 설정과 맞지 않아서 몰입을 할 수가 없단다. 그러면 그냥 안주 메뉴를 바꿀까? 두부랑 칼국수 파는 집인데, 칼국수랑 막걸리는 좀 이상하잖아요. 감자전 같은 건 없어? 감자전 재료는 다 소진되었다는데요. 그냥 대충 두부랑 먹으면 안 되나? 김치가 뭐가 중요해. 완벽한 세팅 앞에서 엎질러진 감독은 슬슬 짜증이 올라온 듯 보였고 배우는 맛깔나게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 설정이었던 것처럼 새우젓 없는 김치에 집착했다. 두 사람의 기싸움 사이에서 주변 스태프들은 초조할 따름이었다. 옆집에서 다른 안주를 사올까요, 아니면 그냥 촬영 장소를 바꿀까요, 그러면 촬영 세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는데, 그냥 누가 하나 져주면 될 텐데. 시간은 흘러가고 둘의 감정선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오늘 안에 이 장면을 찍어야 하는 사실은 명확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 시작된 기싸움이 해결될 틈이 보이질 않으니 눈동자들의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리려 하던 찰나였다.
삭제"저... 혹시..."
많은 스태프들 속 가장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스태프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막내 조연출로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한 사람이었다.
"제 가방에 알레르기 약이 몇 개 있긴 한데... 혹시 도움이 되실까 해서요."
그러면서 가방을 뒤적거리며 한 움큼 약을 꺼내 보여주었다. 현장에 나오기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이 스태프의 가방은 약국이 무색할만큼 온갖 약들로 가득차있었다. 맛깔나게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새우 알레르기가 있던 배우는 머쓱해하며 고민하더니 이내 매니저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종종 먹던 약을 매니저가 발견하게 되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시 쉬어가자는 감독의 말에 모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쉴 곳을 찾아 나섰다. 결국 이렇게 한 소란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나섰던 그 스태프의 상기된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려도. 선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삭제[이 감독 영화는 내용이 없어.]
긁. 아니 꼭 메세지를 전달해야 좋은 영화인가. 재미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팡팡 터지는 액션, 자극적인 전개, 단순하고 직관적인 대사. 영화는 관객 수가 증명하는 거라고. 도대체 너희가 말하는 영화는 뭔데?
순간 스마트폰 화면을 향해 발악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새우 알러지가 심해서 쓰러질 정도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걔 매니저는 뭐했는데? 연출팀은? 그런 기본적인 거 사전 파악 안 하고 뭐했는데? 그는 자신을 돌아보지는 못하고 세상을 탓하는 방식으로 점점 변질되어 갔다. 항상 자신의 곁에는 알랑방귀나 껴대는 사람들뿐이었는데, 화면 속 날것의 비난을 보자 눈이 돌아간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잘못 없다. 스스로를 위안하며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들의 번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락처 목록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마침내 한 연예부 기자의 이름 앞에서 멈췄다. 폭로 기사라면 환장하는 인간이었다. 이 인간이라면 내 억울함을 아주 자극적으로 잘 포장해 주겠지.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 버튼으로 손을 가져가려던 찰나,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삭제기자에게 전화를 걸어봤자 결국 또 다른 자극적인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감독은 쓸쓸하게 전화를 포기하며 홈 화면으로 돌아갔다. 포털 사이트와 영화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번갈아 켜기 시작했다. 직접 등판해서 해명 글을 올릴 타이밍이었다.
'새우 알레르기가 심해서 쓰러질 정도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지가 주는 대로 약을 처먹어 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익명 게시판의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현장 스태프인데, 이번 감독 갑질 사건 진실 알려준다]라는 자극적인 제목도 달았다. 배우의 약물 오용과 연출팀의 사전 조사 미비를 탓하는 문장들이 화면을 채워 나갔다. '나는 잘못 없다, 진짜 피해자는 나다'라는 문장을 적어 내려갈 때쯤, 문득 마우스 커서가 멈췄다.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지금 이 글을 올린다고 해서 과연 누가 내 편을 들어줄까? IP 추적이라도 당해서 감독 본인이 쓴 글이라는 게 들통나면, 그때는 정말로 매장이다. 화면 속 날것의 비난들이 당장이라도 모니터를 찢고 나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결국 그는 올리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적어둔 글을 모두 지워버렸다. 철저한 고립이자 무력감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다시 댓글창을 켰다. 커뮤니티, SNS, 유튜브의 맨 밑바닥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이 미쳐버린 마녀사냥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해 준 존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 수만 개의 모욕을 지나, 한 커뮤니티의 맨 밑바닥에 새로고침 된 댓글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익명_filmmaker : 근데 솔직히 현장 분위기 맞추려고 감독도 예민해진 거 아님? 애초에 알레르기 있는 배우가 지 약도 안 챙겨 다니고 막내가 준 정체불명의 약을 덥석 받아먹은 게 제일 문제지ㅋㅋ 팩트는 감독은 촬영 끝내려고 했던 죄밖에 없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찾았다. 단 한 명의 내 편.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이 거대한 세상의 비난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해 준 존재. 감독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핸드폰을 꽉 쥐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구원이라도 얻은 듯한 황홀경 속에서, 그는 문득 작성자의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비공개 계정이었지만, 프로필 사진에 작게 걸린 이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영화의 크랭크인 날, 전 스태프에게 돌렸던 한정판 팀 후드티의 독특한 로고 자수였다. 현장 스태프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감독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는 며칠 전 연출팀 단체 카톡방의 멤버 목록을 미친 듯이 뒤졌다. 프로필 사진을 하나하나 확대해 보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댓글 속 프로필의 배경에 아주 살짝 걸쳐 있던 고양이 인형 키링이, 연출팀 막내의 카톡 프로필 사진 구석에도 똑같이 매달려 있었다.
진짜 약 봉투를 숨긴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그 앳된 얼굴. 감독의 갑질 폭로 기사가 터진 후, 죄책감에 눈도 못 마주치고 구석에서 눈물만 훔치던 그 조그만 막내 조연출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매일 밤 비난하던 '일 똑바로 안 하는 한심한 연출팀'의 일원이자, 자신 때문에 직장을 잃을까 봐 두려워 숨죽이고 있던 그 아이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감독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괴물 같은 감독을 향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처방약을 잘못 주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비겁한 자기방어였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던 대단한 '명감독'의 유일한 구원자가 현장에서 가장 무시당하던 '막내'의 비겁한 댓글 하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오직 스마트폰의 푸르스름한 불빛만이 감독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토록 갈구하던 '단 한 명의 편을 위한 헌정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감독은 차마 그 댓글에 답글을 달 수도, 막내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핸드폰을 뒤집어 엎어놓았다. 맛깔나는 감칠맛을 내기 위해 듬뿍 넣었던 새우젓이 결국 온 동네 김치를 모조리 썩혀버린 것처럼, 좁디좁은 방 안에는 붉게 버무려진 지독한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끝]
나는 내일 사랑할 거다.
답글삭제나는 내일 사랑할 거다. 오늘은 말고.
삭제너랑 나는 우리밖에 없었다. 서로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이.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렇게 지내왔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를 지나. 나는 네가 내 평생의 짝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어느 날부터일까,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마음이 읽히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쉽게 즐거워했지만 내일 내가 그 친구의 옆에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널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옛날 일을 자꾸 들추면 들춰낼수록 그 시간이 닳는 것 같았다. 그때는 좋았지. 그때는 참 재미있었어. 억지로 내뱉은 내 말들은 지금 너와 함께인 게 하나도 즐겁지 않다는 방증같았다. 차라리 기억 속에만 묻어 두는 것이 나았을까 싶을 정도로. 너를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건 10년 전의 네가 아닐까? 내 마음 한켠에 슬그머니 올라오는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를 밀어 삼켜본다.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우리의 시간이 부정될 수 없도록.
[우리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네가 보낸 메세지를 들여다본다.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미뤘다. 내일 답장해야지. 오늘은 말고.
내일 답장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뒤집은 채로 밀어두었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잠깐 잠이나 잘까 생각했는데, 까무룩 잠이 들어 어느덧 새벽 3시. 이렇게나 내일이 빨리 올 줄 몰랐는데 어느덧 내일이 오늘로 돌아왔다. 어제 하지 못했던 사랑을 오늘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젠 분명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였는데, 잠시 잠든 사이에 읽지 않은 메시지는 5개로 늘어나 있다.
삭제[저번에 회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 친구가 추천해줬는데! 맛있어 보여서!]
[괜찮으면 다음에 여기 가는 건 어때?]
[만약에 해산물 먹기 싫으면~ 그냥 무난하게 여기도 맛있겠다]
[먹을 거 보니까 배고프다! 나는 먼저 잘게]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메뉴를 기억했다가 맛집까지 찾아서 친절하게 나열해놓은 메시지. 친절과 다정 사이의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일의 사랑을 확신하기엔 부족한 말들. 분명 친절한 말들인데 왜 재미가 없을까.
[10년 전에 우리 먹었던 골뱅이 집 생각나? 거기 갈까?]
답장을 썼다 지웠다. 이제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을 끌어오는 것뿐. 10년 전에 사랑했던 기억에 기대면 잠시나마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실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오늘도 내일부터 사랑할 다짐을 하고 넘기는 수밖에.
"인플루언서가 되어야겠어요."
답글삭제팀장의 "격조 있는 홍보" 타령에 민서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구청장님 동정 사진이나 올리려고 그 치열한 인사이동을 거쳐 홍보실로 온 게 아니었다.
삭제얌전한 브이로그로는 조회수 100회도 안 나올 게 뻔했다.
민서는 현실적인 선에서 직장인들이 가장 공감할 만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탈'을 기획했다. 바로 '구청 직장인 생존 가이드'라는 타이틀의 익명 숏폼 콘텐츠였다.
그날 밤, 민서는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귀여운 구청 마스코트 인형 탈을 쓴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모 구청에서 살아남은 7급 닉네임 '김라떼'입니다. 오늘 첫 방송은 직장인 필독, [꼰대 상사 결재 한 번에 패스하는 무조건적인 타이밍 법칙]입니다. 첫째, 팀장이 담배 피우고 들어와 믹스커피 탈 때가 골든타임입니다. 둘째, 월요일 오전 9시는 무조건 피하세요. 주말 부부인 과장님의 히스테리가 정점에 달하는 시간입니다."
민서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구청 마스코트 대신, 탕비실 구석에 박혀있던 커다란 대용량 카누 커피 박스를 뒤집어썼다. 눈 부분만 칼로 삐뚤빼뚤하게 뚫어놓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K-직장인' 그 자체의 비주얼이었다. 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까지 입혔다. 지인의 단속조차 원천 차단하겠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허? 김라떼? 꼰대 상사?”
삭제“….”
“이게 요즘 친구들한테 먹힌다, 이거야? 근데 말이지. 이래서 아무 성과도 없으면 이거 내용 이거 감당할 수 있겠나? 어?”
윗선 결재는 역시나 허들이었다. 오늘 금요일인데. 지금 커피도 마시고 있으면서! 왜 오늘은 안 먹히는 거야, 이 양반. 어제까지 요즘 애들 염불을 외면서 시도 때도 없이 야르-! 밤티-! 타령을 하더만 오늘은 또 왜 이리 공무원이야? 그냥 무작정 올리고 볼 걸 그랬다. 진짜 어쩌라고! 어쩌라고!
민서는 뒤집어지는 속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직장인의 멘탈리티를 유지하려 애썼다. 안면 근육에 힘을 주며 미소를 보인 민서는 일단 그의 말을 들었다.
묵묵한 미소 뒤로 민서는 다짐하고 있었다. 오늘 콘텐츠는 [꼰대 상사에게 꼰대짓 저격하고 살아남기]다…라고.
어김없이 그 삐뚤빼뚤한 구멍의 대용량 카누박스를 뒤집어쓰고 카메라 앞에 섰다. 아까 얼굴 근육에 억지로 힘을 주고 웃던 직장인 민서는 이제 없다. 지금은 새로운 인플루언서로 거듭날 게 분명한 김라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설픈 박스에 불과했지만 박스를 쓰고 나면 세상이 한 30프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70프로만큼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말했다.
삭제”꼰대에게 꼰대짓 스무스하게 저격하는 법 알려드릴게요. 일단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지 몰라서 꼰대거든요.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내가 만든 기획안은 별로라고 까고 본다? 그러면 일단 이거~ MZ 테스트 해보라고 하세요~ 부장님 몇 점이세요? 저는 아쉽게 하나 틀려서 90점인뎅 ㅠ 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다시 기획안 들이밀어보는 거죠~ 부장님도 양심이 있으면, 그래.. 나보단 쟤가 요즘 민심을 잘 알겠지 하겠죠?“
사실 김 부장에게 딱히 통할 것 같은 방법은 아니었다. 사실 모르는 문제가 여러 개 나오면 끝까지 문제를 풀어볼 양반도 아니었다. 귀찮다면서 요즘 애들은 무슨 말을 이렇게 줄여, 하면서 성질내다가 나오겠지. 차라리 김 부장이 의식하는 옆팀 박 부장과 대놓고 비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쪽 부장님은 저녁 회식도 안 하고, 회식하러 가서도 팀원들 고기도 구워주시고, 적당히 저녁 먹고 결제하고 자리 빠져주신다던데요. 밥 먹을 땐 일 이야기도 안 하고. 결혼 괜히 했다면서 너네는 늦게 해라, 은근슬쩍 와이프 욕 같은 것도 안 하고. 야, 그거 비싼 브랜드냐? 그런 데에 돈 쓰지 말고~ 아껴써~ 우리 때는 그냥 돈이 없어서 뭐 무슨 브랜드? 그런 거 따질 새가 어딨어, 그냥 대충 돌려입는 거지~ 아 이렇게 말하면 꼰대인가? 그런 말은 일절 안 한대요. 사실 박 부장님은 우리가 입는 브랜드 뭔지 안 물어봐도 다 알 걸요? 은근히 젊은 브랜드들도 잘 매치해서 입으시던데~ 그러면 아마 아무 말도 못한 채로 담배나 뻑뻑 피러 갈 게 분명했다.
나 지금 뭐하냐. 박 부장을 이용해 우리 팀 꼰대 열받게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다 갑자기 밀려오는 현타에 나는 쓰고 있던 카누 박스를 거칠게 벗어버렸다. 김 부장 엠비티아이가 뭔지는 알까. 엠비티아이 검사 해보셨어요? 하면 어 정상이랜다, 할 것 같은데. 현역 엠지한테 엠지밈을 모르느냐 하지 말고 걍 맡기라고! 엠지를 엠제트라고 말하는 영포티여, 딱 봐라. 진짜를 보여주지. 모두가 퇴근한 시간, 그녀는 어김없이 카누 박스를 뒤집어쓰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주머니 속에는 소중히 들고온 눈알 스티커. 과감하게 가는거야. 제목은.
답글삭제“부장님이 꼰대짓 할 때마다 몰래 눈알 붙이기”
1. 부장님이 저녁에 회식하자고 하심. 부장님이 아끼는 난 화분에 눈알 스티커 붙이기.
2. 부장님이 단체 신발 르무통으로 맞추자고 하심. 개밤티. 부장님 애착 슬리퍼에 눈알 스티커 붙이기.
3. 점심 시간에 냅다 회의 시작하심. 자꾸 제육먹자 하심. 부장님 전 포케 먹고 싶어요. 부장님이 하루에 한 잔 꼭 드셔야 한다던 검은콩 두유 박스에 눈알 스티커 붙이기. 자라나라 머리머리.
4. 부장님 이거 결재 안해주시면 다음엔 눈알 스티커에 속눈썹까지 붙일거에요.
그녀가 올린 쇼츠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탈’이라는 주제에 정확히 부합하며 목표 조회수를 가뿐히 넘겼다. 다들 그녀의 성과를 칭찬할 때, 그녀는 살짝 찢어진 카누 상자를 테이프로 붙이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인플루언서가 되어야겠어요.”
[끝]
지금부터 도망친다.
답글삭제감미로운 하루를 시작해 보고자 설정해놓은 알람 소리가 전혀 감미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저 알람이 들리는 순간 귓가에 들리지 않길 바랄 뿐. 잠을 깨보려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기지개를 켜고 다리와 발가락도 움직여 본다. 아 인정해야겠다. 출근해야 하는 아침이 밝았구나. 나는 원래도 출근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출근을 반가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느덧 만 4년 차, 심지어 지난 2월 대리로 승진한 나는 월급도 올랐고 3년 근속 특별 휴가도 받았지만 이상하게 지난달 무렵부터 아침에 일어나는게 너무 힘들었고 몸을 일으켜 출근준비를 하고 회사로 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벅찼다. 가끔씩 너무 숨쉬는게 답답해서 한숨을 쉬려다 주변 눈치를 보고 탕비실로 가서 깊은 심호흡을 3번 정도 하고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삭제오늘 부서에서 가까운 직원들 다 같이 회사 근처에 생긴 피자집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피자가 땡기지 않기도 하고, 오늘도 역시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답답함을 조금은 진정시켜야 오후에 어느 정도 일이 가능할 듯 하여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 1층 카페에서 라떼 한잔을 테이크아웃해서 근처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라 무척 더울 것 같았는데 아직 그늘진 곳곳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참 좋다. 걷다 보니 그늘로 가려진 벤치를 발견해서 잠깐 앉았다. 오후에 뭘 해야 했더라. 오늘은 저녁 약속이 없지. 퇴근하고 뭐하지? 오늘은 오랜만에 요리를 해먹어볼까? 뭐 해먹지? 물음표로 가득찬 머리속을 헤집다가 문득 정신이 들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부질없어."
이런 말을 내뱉고 스스로가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사춘기도, 반항도, 일탈도 일어나지 않는 흘러가는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함으로써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따라오는 무난함이 내 인생 자체의 나름의 자부심이었는데 뭔가 속에 큰 회오리가 치듯 메스꺼워졌다. 슬럼프...............라는 건가? 내가? 슬럼프가 올만한 삶이 아닌데. 금방 지나가야 해. 지나갈 수 있을 거야.
그의 ‘믿는다’는 말이 그저 ‘아낀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답글삭제믿는다는 말은 곧 나에게 사랑이나 다름없었다. 믿지 않고 사랑할 수 있나. 그러니까 믿음이 깨진 연인들이 헤어지는 거겠지. 신뢰 관계에 금이 간 이후에는 결국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믿지 않으니까. 그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믿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나의 재능을 믿었고, 나의 아름다움을 믿었으며, 나의 생기와 열정을 믿었다. 그런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면서 믿는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의 어떤 면을 보면서 믿는다고 말할 때, 혹은 믿는 듯한 눈빛을 보낼 때 가장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그렇게 오래 서로의 곁을 지키는 관계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덕분이었다. 믿음을 곧 사랑으로 치환하는 나의 믿음 덕분도 있겠지.
삭제믿는 건 맞지만, 그게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 단어의 무게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덜 믿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깨달았는지, 지금부터 한번 말해볼까 한다.
나는 바쁠수록 연락이 뜸해지는 사람이었다. 연락도 일이라고 생각해온 오랜 습관이 불러일으킨 나쁜 버릇이었다. 그와는 몇번 싸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똑같은 말로 변명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거라고. 너는 어떻게 나를 이만큼이나 잘 알면서도 못 믿어주느냐고.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같은 이유로 싸우지 않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잠수를 타는 나를 넘어가주었다. 믿는다는 말 하나만으로. 나는 이게 참 뿌듯했다. 우리 사이에 이만큼의 신뢰가 쌓였구나, 연락이 잘 되지 않아도 그는 나를 믿는구나. 든든했다. 그 날도 몇일째 연락이 오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회사 일로 바빴고 그의 연락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삭제그런 그와 마주친 곳은 병원 한복판이었다. 나는 지인 병문안을 왔고 너는. 너는 다리 한 쪽을 다친건지 목발을 짚고 있었다. 머리에도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복잡한 병원 복도에서 나는, 네 얼굴만 어쩜 그렇게 잘 보이던지. 당황한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왜, 연락을 안했어. 나한테 말을 하지. 나한테 왜 말을 안했어.
“너 바쁜거 아는데 이런걸로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너 원래 연락안할 때 엄청 바쁘잖아. 라고 말하며 너는 담담한 척 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거대한 침묵이 소용돌이쳤다. 너는 나를 믿은 게 아니었다. 그저 내 세계에서 배제되는 것에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그어둔 선 밖에서, 너는 다치고, 아프고, 혼자 붕대를 감으며 내 바쁜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삭제내가 그토록 뿌듯해했던 신뢰의 실체는 결국 방관이자 포기였다. 아낀다는 명목하에 나를 배려한 그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그의 가장 깊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어떻게 말을 안 해, 이런 걸.”
내 목소리는 떨림을 넘어 갈라지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아득해지고, 목발을 짚은 그의 마른 손가락과 하얀 붕대만이 망막에 아프게 박혔다.
그는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은, 그저 잘 아는 타인을 보는 듯한 무덤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했어도 네 입장에선 일방적인 연락이었을 거야. 넌 답장할 여유가 없었을 거고, 난 병실에서 네 답장을 기다리며 서운해했겠지. 그게 싫었어.”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연락을 ‘일’로 치부하며 밀쳐두는 동안, 그는 나를 믿어준 게 아니라 혼자 외로워지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신뢰라는 편리한 단어 뒤에 숨어 내 습관을 강요하는 사이, 우리의 무게추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믿음이 사랑과 동의어라던 나의 오만한 공식은 그의 담담함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에게 믿음은 그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약속, 즉 ‘아끼기에 방해하지 않는다’는 체념에 불과했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네가 말했잖아, 넌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난 그냥 그걸 받아들인 거야.”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목발을 짚고 천천히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규칙적으로 바닥을 짚는 목발 소리가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신뢰라는 이름의 방어벽을 너무 두껍게 쌓아 올린 탓에, 그 벽을 허물고 그에게 다가갈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신뢰에 금이 가면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지만, 진짜 비극은 신뢰가 너무 단단해서 서로를 완전히 방치해 버릴 때 찾아온다는 것을 그 병원 복도에서 깨달았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관계. 우리는 서로를 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나쁜 방식으로 너무 잘 믿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고, 여전히 평온하게 안부를 물었지만,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연극 같았다. 그가 나를 ‘믿어줄’ 때마다 나는 내가 그의 삶에서 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요란한 싸움 한 번 없이, 서로의 바쁜 일상과 깊은 배려 속에서 조용히 풍화되어 갔다. [끝]
“괜찮아. 난 어디서든 잘 자랄테니까.”
답글삭제그것이 내가 이 비좁고 어두운 상자 속으로 던져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나를 화방 구석에서 조심스레 골라내던 영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마치 내 몸통을 이루는 부드러운 흙 속에 깊이 심어진 씨앗처럼 소중히 품기로 했다.
삭제사실 화분으로 산다는 건 꽤 수동적인 일이다. 스스로 발을 떼어 걸을 수도 없고, 목이 마르다고 외칠 수도 없다. 누군가 나를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면 온몸으로 그 온기를 만끽하는 것이고,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신발장 구석에 처박아두면 서서히 말라가는 뿌리를 견뎌내야 하는 삶.
덜커덩.
트럭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내 연약한 초록색 잎사귀들이 박스 벽면에 부딪혀 바스락거렸다. 사방은 온통 컴컴했고, 코끝에는 축축한 배양토와 신문지 냄새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그곳의 볕은 좋은지, 나를 데려가는 주인이 게으른 사람은 아닐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식물에게는 식물만의 꿋꿋한 시간이 있는 법이니까. 인간들이 이사를 하고, 직장을 바꾸고, 사랑을 잃으며 요란하게 흔들릴 때도, 우리는 그저 흙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물을 끌어 올릴 뿐이다.
이윽고 단단히 닫혀 있던 상자 틈새로 눈이 시릴 만큼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테이프가 찌르르 뜯기는 소리와 함께, 낯선 공간의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어라, 이게 뭐야?"
삭제낯선 목소리였다. 영주의 부드러운 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아니면 더 나이 많은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한 그런 중간쯤의 톤. 나는 박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래로 떨어질까봐 자꾸 잎사귀를 움츠렸다.
"아, 여기 적혀 있는것 같은데... 이름이 뭐라고 적혀 있는데 아닌가..."
상자가 들려 올려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는 새로운 공간을 마주했다. 창은 있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뿐이었다. 햇빛은 오후 한두 시간 정도만 스쳐 지나갈 것 같은 서쪽 창. 영주의 말처럼 "어디서든" 잘 자란다고는 했지만, 이곳이 내가 상상했던 곳은 아니었다.
나는 화분 속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식물의 꿋꿋함이란 결국 이런 것 아닐까. 기대와 현실 사이의 틈을 메우지 않고도,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녹색을 지켜내는 것. 새 주인이 내게 물을 줄지, 아니면 잊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삭제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나를 찾아서 구매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우연히 선물받거나 아니면 잘못 배송된 것일까. 사실 나도 내가 무슨 식물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처할 따름이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목소리를 내어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조금 드는 햇살 옆에서 고개를 쳐들고 광합성을 하는 것. 그렇게 한 뼘이라도 더 자라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존재감을 뽐내는 것. 식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버티기뿐인 삶인 거구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굳이 식물이 아니더라도, 버티는 것이 존재 이유인 것들이 많지 않나. 사람들도 결국엔 오래 버티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거니까.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니까. 어디서든 잘 자랄 테니까, 라는 말은 나의 생명력이 생각보다 굳건하다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일단 주인이 물을 자주 주지 않는다고 해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살아남아보자. 그러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겠지.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나의 주인은 나를 잘 돌봐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내가 고민을 하던 사이, 어디선가 샛노란 물뿌리개를 구해와서 나에게 물을 뿌려줬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설퍼 보여도 다 어딘가에 물어봐서 주는 거야. 적당히 흙이 젖어서 촉촉해질 정도로만 물을 주면 된대. 괜찮아, 너도 나도 어디서나 잘 자랄 테니까.“
어딘가 영주를 닮은 목소리였다. 어쩐지 여기서라면 잘 자랄 수 있을 거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끝]
사람들은 정말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답글삭제그러자 조금 삐지신 건지, 시무룩해지신 건지 알았다고 혼잣말을 하시며 뒤돌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잠깐 동안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은 떠나시고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잠시 멍을 때렸던 것 같다. 해는 진작에 떴고 아침을 먹지 않는 나에게 점심이 허락되기엔 조금 이른 애매한 시간대였다. 그대로 몸을 옆으로 뉘여 낮잠을 청해볼까 하다가 커피를 마셔야겠다 싶어서 얼른 고양이 세수와 양치를 하고, 문고리에 걸려있는 캡모자를 뒤집어쓰고 일기장과 노트북을 한 손에 들고 10분 채 안 걸리는 카페로 나섰다.
삭제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어폰을 귀에 끼고 책을 펼쳤다. 아무것에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최적의 셋팅이었기에 낮잠 대신 카페를 선택한 스스로에게 조금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정말 처음 본 머리색을 하고 지나가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한가지 색이 아니었다. 무지개...? 도 아닌 것 같은데. 아! 최근에 어느 소품샵에서 봤던 크지 않은 유리 그릇에 테두리 무늬가 딱 저런 패턴과 색감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색에 관심을 뺏기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개팅을 나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침부터 다이슨을 정말 열심히 하고 나온 것 같은 20대 후반 정도의 여성분이 택시를 잡고 있는 모습, 신혼부부인것 처럼 보이는 젊은 부부가 커플로 맞춘 것 같은 츄리닝을 같이 입고 산책하는 모습, 학원을 가는 듯한 자기 몸보다 무거울 책가방을 등에 매고 학교 체육복을 입고 가는 학생들의 모습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신기했고 스타일과 행동이 나의 상상과 맞을지도 궁금했다. 그렇지만 제일 신기했던 이 생각의 마침표는 그 중에서 아무도 그들을 보고 있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정말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쳇바퀴에 타 있을 때는 누구보다 쳇바퀴를 열심히 타야 하기에, 또한 쉼의 시간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일체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 하기에. 나도 이제 정말 나만의 시간으로 들어가야겠다. 나한테 너무 소중한 이 휴일의 시간에 관심을 가져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