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글쓰기클럽 1기
싱겁지만 사다리타기도 했어요.
어떻게 시작하나?
룰렛으로 인스타그램 글들 중 5개의 글감을 정하고, 사다리타기로 참여자마다 시작 글감을 배정했습니다.
각자 닉네임을 정한 뒤, 해당 이름으로 글감에 답글을 달아 글을 씁니다.
댓글 작성 시 URL 입력란은 생략해도 됩니다.
구글 이메일 사용도 가능합니다.
댓글 수정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쓰나?
8일~10일(마감 10일), 11일~12일(마감 12일) 등의 방식으로 총 10회 씁니다.
다음 글은 어떻게 쓰나?
내가 쓴 댓글 바로 아래 글감에 이어서 씁니다.
오늘 〈다정은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쓰셨다면,
다음에는 〈로또에 당첨됐다.〉를 이어 쓰고,
그다음에는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할까?〉를 이어 씁니다.
다음에는 〈로또에 당첨됐다.〉를 이어 쓰고,
그다음에는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할까?〉를 이어 씁니다.
완성 및 완성 후는?
완성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 뒤에 [끝]을 적어 완결 표시를 해주세요. 완성 후에는 카테고리에 완성글을 게재하며, 다음 세션에 제가 새로운 글감을 올려드립니다. 완성하신 분은 다음 번에 새로운 글감에 이어 써주시면 됩니다.
출석 체크
총 10회 전 세션 참여 시 소책자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날짜 기록을 토대로 확인하며, 세션 기간 동안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각 세션 시작일 오전에 알림 이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주의 사항
자율적인 글쓰기 프로그램이지만, 형평성을 위해 한 번에 최소 300자는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더 길어지는 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이렇게 댓글을 달고,
답글삭제답글로 글을 써주시면 되어요.
삭제작성 후기 와글와글 💌
삭제아 여러분 제가 매 세션마다 진행 중인 글들을 캡쳐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하는데 괜찮나요?!
삭제다들 글을 너무너무 잘 쓰시는데요..... 🤭 다음 글도 무척 기대돼요
삭제인스타 게시 좋아요~~ <3
삭제인스타 업로드 하셔도 괜찮습니당 !
삭제업로드 좋습니다 ~ !! 야호
삭제ㅎㅎㅎㅎ 넵넵 감사합니다여러분 앞으로도 서로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다면 여기에서 와글와글해주세영
삭제타코야끼
삭제와우 로또글 읽다가 저도 모르게 뒤돌아봤네요
삭제왘 오싹합니닷
삭제다정 이야기 이미 다른 행복으로 걸어들어갔다는 게 표현이 참 좋네요ㅠㅠㅠ
삭제이제 뭔가 각자 스타일이 느껴져서 재밌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야기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너무 신기하네요 >_<
삭제그러니까요!!! 오~ 이렇게 이어지려나? 하면 전혀 아닌 ㅋㅋㅋㅋㅋ 신기합니다.
삭제ZZZZ 이번 회차에 17층 이야기 제 뒤에 쓰신 든님... 든님 말씀이 맞아요... 21층 = 지아입니다... 제가 중간에 이름을 바꿨는데 한 군데만 고쳤나봐요!!!!!! ㅠㅠㅠㅠ 헝 찰떡같이 이해해주시고 멋진 글로 이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혼란드려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1!!!!!!
삭제오 맞다니 다행입니다!!!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해요!!ㅎㅎㅎㅎ
삭제헉 어느새 한 달이 지나 끝났네요..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고 글 보는 재미가 가득했습니다!! 다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삭제다정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답글삭제그렇게 생각했어. 함께 하지 못해도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면 괜찮을 거라고.
삭제너와 함께 있던 곳을 떠나온 지도 시간이 꽤 흘렀을 거야. 이곳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또 네가 있는 그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유독 너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날이야.
오늘은 너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라,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했어. 언젠가 우리는 다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네가 다정한 스타일은 아니지’라는 말을 듣고 온 너는 무척 억울한 말투로 그 얘기를 털어놓았어. 나는 ‘넌 다정하진 않지만 정은 많은 사람이지’라고 대답했고, 너는 같은 말 아니냐며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잔소리가 많긴 하지. 근데 그게 다 애정에서 나오는 거라고!”
너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더니, 그대로 벌러덩 누웠어.
그때 파란 캔버스 같은 하늘 위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갔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걸 함께 바라봤지.
“만약 어딘가에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면, 여기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떠날 거야?”
내가 그렇게 묻자, 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했어. 지금 이곳에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있고, 또 내가 행복하게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고. 너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지만 되묻지는 않았지. 어쩌면 너도, 나도 알았을 거야.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이곳을 떠날 거라는걸.
지금의 나는, 그 질문의 가정과는 달리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음에도 결국 그곳을 떠나왔고, 너를 떠나오고서야 그 대화가 자꾸 맴돌아. 설령 그게 진심이 아니었어도, 너와 함께 있는 이곳을 선택할 거라고 말해줄걸.
다정은 혼자 담아두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가 함께 남겨야 하는 거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돼. 다정에도 시차가 있다니.
과연 내가 다시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는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원망하지 않을까.
때로는 이런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하지만,
다시 만나는 날엔 내가 먼저 두 팔 벌려 외칠게.
널 위한 재밌는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네가 보낸 그때의 다정함이 나를 다정하게 해.
늦었지만 날 기다려줄래?
아니, 아니야. 기다리지 마.
삭제난 지금도 앞으로도 너에게 갈 수 없어.
너에겐 내 다정함이 남아 있을지 궁금해.
내가 너에게 베푼 다정함은 뭐가 있었을까?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들을 치우고 버텨내고 온갖 방해와 싸우려던 널 밀어낸 거?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하지도 않으면서 지쳐 말라가는 널 그냥 놔둔거?
결국 니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그냥 단번에 알겠다고 하고는 떠나버린 거?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와 헤어진 일을 후회하지 않는거?
나는 너에게 다정했다고 생각해.
아주아주 오래도록 기억될테니까.
나는 끝까지 너에게 이런 사람으로 남을거야.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거니.
.
.
.
"언니, 저 작가 알아요?"
"응?"
"저기 개인전 한다는 작가요. 언니랑 같은 학교인 거 같던데, 나이도 비슷할 거 같고. 학교 같이 다니지 않았을까요?"
"아, 글쎄. 그래도 뭐 내가 다른 사람들 다 아는 건 아니니까."
"하긴 그렇죠. 근데 신기하다. 작품을 꾸준히 한 것도 아니고 아예 다른 일을 했다고 하던데 갑자기 개인전까지 열고."
"응, 신기하네. 아 나 잠깐만 사무실 좀 다녀올게."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너의 이름이었다.
타코야끼
삭제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무슨 감정일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한채 사무실 문을 열었다.
삭제오랜만에 마주한 너의 다정함에 무방비가 되어서 다리가 풀려버릴 것만 같아.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책상 앞으로가 키보드를 두드려 너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너의 이름 세글자는 언제나 나를 아프게했지 . 왜일까?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일텐데 늘 너와의 관계는 나에게 큰 미련이 되어 남아버렸다.
지금까지 너를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이유를 알아버렸어. 그 시절 미숙했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거든. 언젠가 너에게 다시 연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하지 않았어. 너랑 연락하기 위해서는 난 다시 너가 알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했거든.
하지만 난 그때의 내 모습을 나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 마주하고 싶지도 않아. 널 밀어내는 방법을 몰라서 미숙하게 별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가면서 우리 사랑을 마르게 했지. 영문도 모른채 나의 미숙함이라는 낫에 베여 시들어가는 너를 보며 사실은 나도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어.
참 신기했지. 그렇게 내가 널 산산조각 내어놓아도 . 다음날이면 넌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 다정함을 온몸에 다시 휘두르고 나타나서 나에게 따듯하게 말을 걸어줬으니까.
그러면 또 나는 나만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그런 너를 더 밀어내려고 했고, 결국은 그런 나에게 지쳐버렸지.
너도 결국 똑같구나.
어짜피 그렇게 될거 뻔히 알고 있었지만. 너에게서 더 이상 예전의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너의 다정함이 나에겐 기쁨이었고, 동시에 폭력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옛 회상을 하며 검색 결과 끝에 있는 너의 개인전 전시회 기사들을 보다가 최근에 올라온 인터뷰를 클릭해본다.
작가님에 대해서 궁금증이 가득해요. 아예 다른 일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어쩌다가 작업을 하게 되었고, 개인전까지 열게 된 걸까요?
삭제- 확실히 저는 다른 작가분들과는 커리어가 다르긴 해요. 하지만 늘 내면에 표현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고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업이 아닌 다른 일을 하던 중에도 그 표현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어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일까요?
- 제가 어느 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요. 그 사람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서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싶었어요. 혹시 몰라요. 언젠가 제 작업이 여기저기 알려지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도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작가님이 그리는 그 사람이 전시회에 왔을까요?
- 반반.. 아니, 51과 49의 확률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 마음은 51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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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답을 보다가 혼란한 생각이 가득해져서 이내 포털 사이트를 껐다. 너의 개인전과 관련해서는 꽤 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심찮게 너의 전시에 대해 평을 남긴 블로그 글도 볼 수 있었다. ‘작가의 애달픔이 느껴진다’, ‘그리워하는 대상을 참신하게 묘사했다’… 등등 너의 작업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과연 내가 맞을까. 사실 너로부터 도망쳐 왔던 시간이 꽤 긴지라, 네가 그리는 사람이 만약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자의식이 과잉된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진다. 정말 나인지 아닌지, 만약 나라면, 그렇다면 너는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전시장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 너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삭제“다정한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이야. 우리의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던 나는 너를 기억할거야.”
그 때의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은 곁에 남는 거라고만 생각했거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주 연락하고, 끝내 떠나지 않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 사랑이고, 다정이라고 믿었어.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서로를 떠났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조금 뒤늦게 깨닫게 됐다. 어쩌면 너를 통해 배운거지. 다정은 꼭 붙잡는 마음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미 끝난 관계를 억지로 되살리려는 집착도, 매일같이 안부를 묻는 부지런함도 아니었다. 너가 말한 다정은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한 사람을 함부로 지워내지 못하는 마음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던 계절을 기억하는 것.
문득 길을 걷다가 발견한, 내가 좋아하는 꽃을 찍는 것.
아주 오래전 네가 건넸던 말을,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올리는 것.
전시장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문을 열기를 망설였다. 혹시 너와 마주치게 될까 봐. 아니, 사실은 네가 나를 알아볼까 봐 무서웠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네 눈에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미숙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 봐.
그런데도 결국 여기까지 온 건, 아마 나 역시 오래도록 너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조심스럽게 전시장 문을 열자 잔잔한 음악 소리와 함께 희미한 물감 냄새가 스쳤다. 벽면 가득 걸린 그림들은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비가 오던 골목길, 함께 걷던 강변 산책로, 네 자취방 창문 너머로 보이던 늦은 새벽의 하늘. 그리고 그림 속 인물의 뒷모습은 전부 나를 닮아 있었다.
나는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발을 떼지 못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누군가가 아주 밝고 투명하게 웃고 있었다.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는데도 분명 알 수 있었다. 네가 바라보던 나라는 걸.
마침내 다음 작품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전시장 한쪽에서 너가 멋진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옆에는 그림의 주인공과는 다른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여전히 밝고 따뜻하게 웃으면서.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네가 이미 다른 행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실감이 났다.
그대로 뒤돌아 도망쳐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네 시선이 천천히 내게 닿았다.
그리고 너는 웃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반가운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눈으로.
여전히 다정한 사람의 표정으로.
너의 말이 맞았다. 다정은 결국, 잊지 않는 마음이었다.
[끝]
삭제로또에 당첨됐다.
답글삭제나는 로또에 당첨됐다!
삭제아니, 정확히는 길에 떨어진 로또 용지를 주웠다. 낙첨이라 버리고 간 거겠지 싶다가도 혹시 몰라서, 또 그냥 버리자니 신경쓰이니까, 정말 만에 하나 당첨이라는 이 티끌같은 희망을 찌질하게도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확인해버렸다. 그런데 이게 당첨일 줄이야? 그것도 1등에! 티끌모아 태산, 정직한 벌이 같은 건 모르겠고 그저 양심 없이 일확천금의 기회만을 노리며 출근길 회사 앞 로또 명당 가게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 주도 빼놓지 않고 긴 줄을 기다려 로또를 사던 내 돈과 시간은 다 어디 간걸까? 좀 허탈하네. 아니야, 이렇게 보상받는 걸수도 있지.
고물가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 쥐꼬리만한 월급에 바들바들 떨고 세상 곳곳의 눈치를 봐가며 살다 억만장자가 되려니 되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꼬박꼬박 빠져나간 오천원짜리 소비내역만큼이나 길어진 을 열어본다. 휴대폰 메모 앱에서 가장 용량이 크네. 엔비디아 주식 사기. 부모님 크루즈 여행 보내드리기. 한남동 리버뷰 아파트 사기. 포르쉐 사기(이왕이면 까레라.). 스위스로 럭셔리 여행 떠나기. ……
가만히 읽어보니 너무 뻔한 것들 뿐이다. 조금 더 잘, 알차게 쓸 방법이 있으려나. 난 이 돈으로 뭘 하고 싶은 거지? 돈이 많아봤어야 알지. 아니야, 이제 알아가면 되지. 아… 퇴사할까? 마음이 들뜨다 못해 붕 떠 나를 더 하늘로 띄워버릴 듯하다.
그런데 하나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이거 내가 산 거 아니잖아?
누가 본 건 아니겠지?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삭제바로 앞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자리를 탐색한다. 저 끝의 소파 자리가 좋겠어. 로또 1등-주웠더라도 일단은 내 손에 있으니까-이라는 일생일대의 위시리스트를 달성한 흥분감 때문인지, 진짜 내 것이 아니라는 불안감 때문인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잠수 전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는 것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크게 들이마신다. 침착하자, 침착해.
그때 카페 안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누군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더니 창가 자리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뭘 두고 갔냐는 주변 사람들의 물음에도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남자.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나와 로또의 세계로 돌아간다.
"혹시... 분실물 들어온 것 없을까요?"
번잡한 카페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듯 그 사람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얼어버린 채 고개를 든 순간, 카운터 앞에 서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처음 본 저 사람이 마치 내 로또를 뺏으러 온 일생일대의 적인것처럼 느껴졌다. 로또 종이를 줍고, 당첨인 걸 확인하고, 커피를 주문해서 앉은지 이제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행복이 여기서 끝나고야 마는걸까. 그래, 원래도 내 것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지만 이 커다랗고 무거운 행복이 내 손 안에 이렇게 작고 가벼운 종이로 생생히 들어와있는데.
삭제"잠시만요, 제 근무타임 때는 들어 온 분실물이 없었는데... 매니저님께도 한번 확인해보고 올게요."
직원의 친절한 답변에 그는 곧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직원에게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의식하지 말자. 부자연스러우면 저 사람은 더 나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한 뒤에 휴대폰을 켰다.
'로또 당첨금 수령 방법'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거다. 팔랑팔랑 날아갈 듯한 종이가 아니라 진짜 돈으로 받아야겠다. 진짜 내 통장에 길고 긴 숫자로 찍혀나와야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저 쪽에선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나오더니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내 귀는 이미 저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혹시 언제 잃어버리셨어요?"
"아 그게, 오늘 아침에요... 작은 검정색 USB요."
"검정색...이면 혹시 이거 맞을까요?"
"오! 오! 네 맞아요! 아 여기 두고 갔구나. 아... 와... 와 진짜 감사합니다. 아까 아침에 테이크아웃 기다리다가 잠깐 흘렀나봐요. 아, 찾아서 다행이다..."
"아까 매장 청소하다가 오전타임 직원이 발견했다고 하더라구요. 물건 찾으셔서 다행이네요!"
"아우,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 로또 주인이 아니었다.
똑,, 똑,, ,똑 ...
삭제검은 모자를 쓴 남자의 손 끝에는 후라이팬이 쥐어져있었고 후라이팬 모서리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있었다. 엉겨 붙어있는 피와 살점 사이에는 머리카락들도 흉측하게 엉켜있었다. 그 끝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뚝뚝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앞에는 남자에게 얻어맞은 듯한것으로 보이는 또래의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벽에 등을 기댄채 앉아있었다.
남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급하게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몸을 뒤져 종이 뭉치를 찾아내었다. 종이 뭉치를 오른쪽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우선 집에가서 씻자. 씻고 생각을 해보자. 집에가서 남자는 샤워를 하고 다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몇달간 관리하지 않았던 그의 집에서는 여분의 옷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옷이나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입고는 아까 썼던 검은모자를 머리에 푹 눌러쓰고 집 밖으로 다시 나왔다.
남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집앞에 있는 카페에 가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키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때 동창이었던 모상민이 그에게 전화를 했고 , 비밀 한가지 말해주겠노라며 만나자고했다. 나도 찔리는게 있어 모상민이 자기집으로 오라고 했을 때 학폭 때문에 나를 부른건가. 하는 걱정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모상민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모상민의 집에 갔더니 그가 하는 얘기는 자기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 그래서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중에 제일 싫었던 나에게 전화를 한거라며 . 너의 인생은 이제 끝장이라는 얘기를 면전에다가 와다다 내뱉는데 너무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무시하고 괴롭히던 그 모상민이가. 로또에 당첨 됐다고?
그리고 내 인생을 이제부터 짓밟겠다고?
그럴 순 없지 한번 내 발밑에 있던 놈은 영원히 내 밑에 있어야해.
너의 행운은 내 것이야. 학창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급하게 카페에서 모상민한테 빼앗았던 종이 뭉치를 꺼내어 확인해보려는데 종이 뭉치가 많아도 너무 많아 바지에서 꺼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일부는 바닥에 떨어지기도해서 급하게 다시 주워 모아서 그 중에 모상민이 말한 당첨된 로또 용지가 어디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아 여기있네. 이게 그 행운의 로또란 말이지?
로또를 잠시 책상 위 올려두고 흐믓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해외로 도망가서 남은 여생은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군.
생각도 잠시 한 손님이 카페에 들어오려고 문을 열자마자 강풍이 들이닥쳐 남자의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뭉치가 카페 전체에 흩뿌려지고 말았다.
남자는 혼미백산해 날라다니는 종이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서 대부분의 용지를 다 회수한 남자는 속으로 시발시발을 외치며 바람과 함께 들어온 사람을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뭉쳐진 종이 덩어리를 다시 확인해보려고 하던 찰나 핸드폰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4342 차주 분이세요? 차좀 빼주세요. "
남자는 차를 빼러 잠시 바깥에 나갔다. 차를 빼는김에 차안에서 종이 뭉치를 다시 꼼꼼하게 체크해보기 시작했다. 어라.? 당첨 용지가 어디갔지? 설마 카페에 당첨 용지를 떨어트리고 온건가?
남자는 황급히 카페로 돌아가 카페 직원에게 분실물 들어온게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던 중 앞에 앉아있던 한 여성의 핸드폰 내용을 보고나서 말을 바꿨다.
남자는 로또용지를 찾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usb 를 찾는다고 직원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까부터 거슬렸던 바람과 함께 들어온 그 여자가 지금 남자 앞에서 핸드폰에 '로또 당첨금 수령 방법' 을 검색하고 있는걸 봤기 때문이다.
저 여자를 어떻게 죽이지?
삭제모상민을 죽이고 난 뒤에 여자 하나쯤 죽이는 건 이제 일 같지도 않아졌다. 왜 죽이느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저 여자를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저 로또 용지가 내 것이 되니까. 그리고 1등 당첨금이 바로 내 것이 되니까.
무엇보다도, 저 여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모상민을 죽인 것이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오히려 감옥행을 갈 수도 있겠다. 프라이팬과 옷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할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증거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 할 테고.
그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자를 죽여야만 한다.
일단 여자는 내가 눈치챈 걸 모르는 듯하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게 가증스럽다. 빨리 밖으로 빼내야 한다. 빼낼 수 없다면 이 근처에서 저 여자가 나올 때까지 잠복근무할 수밖에.
일단 USB를 집어 들고 밖에 나온다. 이 근처에서 잠복하면서 기다릴만한, 그러면서도 여자의 동선이 잘 보이는 곳을 찾는다. 때마침 맞은편 버거킹이 2층까지 있는 건물이다. 통창이 나 있고 각도가 여자의 행동을 주시할 수 있는 곳이다.
콜라 하나 시켜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번화가 한복판은 아니라 그런지 2층은 꽤 널널했다. 창가 자리로 갔다. 여자를 지켜본다. 여자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언제쯤 밖에 나갈 생각인거지?
동시에 답답해진다. 저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죽여야 하지? 저 여자가 만약 당장 당첨금을 받으러 간다면 나는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여자가 이동하는 동선 중에 내가 죽일 기회가 있을까?
오만가지로 속이 시끄럽다. 저것은 분명 내가 가져야만 했다, 분명히. 그러던 와중 그 여자가 이 근처를 보는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려 꾸역꾸역 버거킹의 인테리어를 뜯어본다. 동시에, 주변에 나를 살피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본다. 다행히 저 구석의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 외에는 없다.
5분은 지났을까? 시선을 돌려 다시 카페를 봤는데, 아 시발. 여자가 없다. 도대체 어디 갔지? 카페 내부를 살피다가 밖에서 택시를 타고 있는 여자를 봤다. 안돼 시발, 저 돈은 내 거라고!
황급히 여자를 따라 밖을 향해 나갔다.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는 미친 듯이 달렸다.
삭제“씨발…!”
그 순간, 뒤에서 거친 손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거기 서.”
낮고 굳은 목소리. 돌아보니 어딘가 낯익은 사람이다. 버거킹 2층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노숙자. 그러나 이렇게 보니 노숙자라고 하기엔 너무 건장했고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구겨진 까만 점퍼 사이로 경찰 배지가 스쳤다. 잠복 형사였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반항하고 도망쳤다. 격한 움직임에 남자의 주머니에서 우수수 쏟아진 종이 뭉치 사이로, 구겨진 로또 한 장이 도로 위 바람에 떠올랐다.
택시 문이 닫히는 순간,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장 가까운 본점으로 가주세요.”
목소리가 떨렸고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여자는 가방 안에서 로또 용지를 몇 번이나 꺼냈다 접었다. 구겨질까 조심하면서도, 이 종이 한 장이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꿔줄 거라는 생각에 숨이 가빠졌다.
은행 VIP 당첨금 수령 창구.
목소리를 최대한 침착하게 유지하려 애썼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방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로또 용지는 이미 손땀에 젖어 가장자리가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 적힌 번호는 여전히 선명했다.
“1등 당첨금 수령하러 왔어요.”
직원은 익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용지를 받아 들었다. 바코드를 스캔하고, 전산을 조회했다. 화면을 확인하던 직원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한 번 더 확인, 그리고 다시 번호 대조.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급자를 불렀다. 여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잠시 뒤, 정장을 입은 담당 직원이 직접 나와 공손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1등 당첨 맞습니다.”
순간 귀가 멍해졌다. 진짜였다. 주운 로또지만, 분명 지금 제 손 안에 있었고. 이제 나는 억만장자이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여자는 멍한 얼굴로 웃다가, 거의 울 듯 숨을 삼켰다.
그 시각, 은행 밖.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경찰에게서 도망쳐 헐떡이며 도착해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창구 앞에서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진짜…”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 속 종이 뭉치를 다시 움켜쥐었다. 아까 급히 뛰어오다 바지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어둔 종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은행 입구 앞 대리석 바닥 위로 여러 장의 구겨진 용지와 영수증, 메모지들이 흩어졌다.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 중, 손에 익은 한 장, 피 묻은 손으로 구겨 쥐었던 로또 용지. 모상민에게서 빼앗았다고 믿었던 그것.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번호를 다시 봤다.
2, 11, 19, 31, 42…
“…37.”
얼굴이 굳었다. 다시 봤다. 37이 아니었다. 27.
잉크 번짐과 구겨진 자국, 피가 말라붙으며 번져서 보였던 숫자. 그는 미친 듯이 다시 바코드 옆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다른 종이들도 뒤졌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들고 있던 로또는 여자가 주운 당첨 용지와 전혀 다른 종이였다. 그리고 그건 처음부터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남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은행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안쪽에선 직원들이 여자를 안내하고 있었다. 떨떠름해하면서도 행복하게 웃는 여자가 보였다.
밖에선 경찰차 두 대가 천천히 멈춰 섰다. 카페 CCTV, 모상민 집 인근 블랙박스, 남자의 차량 이동 기록, 피 묻은 프라이팬. 모든 게 완벽하게 이어졌다. 경찰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모상민 씨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남자는 저항하지 못했다. 고개만 천천히 들었다. 유리창 안쪽, 당첨금을 수령하러 사라지는 여자. 그리고 자신의 손 안, 찢기고 피에 젖은 낙첨 로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 증거를 숨겼다. 여자까지 죽이려 했다. 그 모든 이유가 자기 것이었던 적도 없는 행운 때문이었다. 남자는 경찰에게 끌려가며 중얼거렸다.
“…괜히 죽였네.”
한편, 여자는 아직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내가 로또에 당첨된 게 진짜라고? 이렇게 갑자기 행운이 찾아와도 되는 건가?
삭제여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축하가 모두 트루먼 쇼의 한 장면 같아서 낯설다. 어쩐지 이곳의 문을 박차고 나가면 컷 소리가 날 것 같고, 모두 고생했다고, 마치 영화의 한 촬영 장면처럼 물거품이 될까봐 무섭다.
동시에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대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다시 휴대폰 메모 앱을 켜본다. 막연하게 적어 놓았던 것들을.
- 엔비디아 주식 사기
- 부모님 크루즈 여행 보내드리기.
- 한남동 리버뷰 아파트 사기.
- 포르쉐 사기.
- 럭셔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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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을 바라보다가 어찌할 줄 모르겠는 여자는 우선 집에 돌아왔다. 작고도 작은 월세방. 그저 내 몸 하나 겨우 눕힐 수 있었던, 그마저도 이 공간에 눕기 위해 매일 야근을 하며 밖에서 꼬박 10시간 이상을 보내야 했던 요즘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는 그렇게까지 아득바득 살더라도 덜 서러울 테다.
내일 당장 회사에 가서 사직서를 내야 하나? 고민이 앞선다. 인간이, 그리고 이 빡빡한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 의, 식, 주 중에서 뭘 가장 해결하기 힘들까?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왔다. 바로 ‘주’다. ‘의’와 ‘식’은 회사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소일거리나 아르바이트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우선 집을 먼저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 부모님 생각도 해봤지만, 지방에 계신 부모님은 적어도 자가니까. 서울에 치여 사는 자신을 항상 걱정하던 부모님의 눈빛이 선하다. 그러니 자신의 집을 먼저 구매해야겠다.
한남동 리버뷰 아파트를 검색해 봤으나, 여기에 산다면 아파트를 매매한 이후에 남는 게 거의 없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여자는 평소 자신이 좋다고 생각했던 동네들의 시세를 검색해 본다. 밤새도록 심장이 쿵쾅거리는 탓에 한숨도 못 자고 노트북 앞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우선 급하게 연차 처리를 할 요량으로. 아니, 어쩌면 당분간 아프다고 병가를 내고 집을 보러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자고 일어나니 부자가 되어있었다.'
삭제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면서 근사한 말인가. 근데 심지어 내가 그 주인공이다.
회사에는 일단 이틀 연차를 내겠다고 연락부터 하고 어제 보다 잠들었던 아파트 매매 검색 기록 화면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무슨 기분인지도 모른 채 저녁도 거르고 아파트 시세를 확인하느라 배가 너무 고팠지만 그게 뭐 대수일까. 통장이 배가 불렀고, 곧 있으면 난 서울에 있는 내 집에서 살게 될 텐데. 지금 배고픈 것쯤이야. 이따가 잠깐 길 건너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오면 된다.
아니, 아니지. 편의점이라니. 내가 지금 돈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편의점이라니. 뭐라도 시켜먹을까. 평소에 못 시켜봤던 궁금했던 메뉴들을 한가득 시켜볼까. 아 진짜! 평소에 내가 돈을 써봤어야지. 호텔 뷔페? 유명한 오마카세라도 가야하는 거 아니야? 그게 예약이 되나? 일단 그것도 천천히 하면 될 일이고. 집, 차, 여행, 주식. 너무 할 일이 많다. 언제 어디서부터 알아보고 다 사고 돈 쓰고 놀러다니지?
돈이 많으면 쓸 시간이 없다더니 이런 뜻이었구나. 후, 침착하자. 다 내거니까. 지금 안 쓴다고 누가 훔쳐가는게 아니니까 신나게 누리자. 행운은 나의 것이니까. 이미 내 손 안에 들어와있으니까.
다시 한 번 아파트 시세를 검색하려고 인터넷 창을 새로 켜다가 여자는 홈 화면에서 한 뉴스 기사에 시선이 꽂혔다.
'ㅇㅇ동 50대 남성이 아내 살해, 동기는 로또 당첨 용지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분노'
여자는 홀린 듯이 그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서울에서 한 50대 남성이 로또 당첨 용지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여 어제 긴급 체포되었다.
ㅇ일 서울 ㅇㅇ경찰서는 이 부부는 로또에 당첨되어 당첨금을 수령하러 가던 중 아내가 잠시 가방을 정리하던 사이에 가지고 있던 당첨 용지를 분실하였고, 이를 찾지 못하자 분노한 남편이 아내를 자택에서 둔기로 여러 차례 가격한 끝내 아내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비명소리와 구타 소리를 들은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였고 그 자리에서 남편인 50대 남성은 바로 체포되었다.
한 편, 이웃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이 부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화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여자는 뉴스 기사 창을 끄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어제 꿈 같이 기쁘게 받아와 손에 꼭 쥐고 잠들기까지 했던, 배가 부른 통장 속에 찍힌 숫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끝]
삭제그 아이는 나를 기억할까?
답글삭제없는 돈을 털고 털어서 일본으로 훌쩍 갔던 건 순전히 억울한 마음을 보상받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떠난 여행은 생각보다 내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생각 정리를 위해 간 여행이지만 혼자 여행의 묘미는 혼자를 채워주는 여행 도중 만난 이들이었다.
삭제다정하고 친절했던, 그리고 영어 공부를 열성적으로 하던 삿포로의 호스트와 작별한 뒤 도쿄로 훌쩍 넘어갔다.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시부야… 도쿄를 여기저기 걷고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아사쿠사 근처의 숙소로 저녁에 돌아왔다. 나처럼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원하는 외국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 애는 나와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고, 공교롭게도 한국인이었다. 남은 엔화 동전을 어찌할 줄 모르던 그 애는 나에게 편의점 근처에서 술을 사서 같이 마시자고 했다. 얼떨결에 그 애와 편의점에 같이 가서 남은 엔화로 맥주를 털고, 그나마 남은 엔화도 잘 쓰라며 받고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았다. 한국에,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각자가 일본을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다. 몇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조금 흐릿하지만, 오히려 실제로 자주 봤던 사람들에게는 말 못 할 이야기들을 조금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면 평소와는 다르게 외향적으로 굴었었나? 기억나지 않는 것들 투성이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각자의 숙소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의 SNS 계정을 물어봤을 법도 했는데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억의 여운이 평생 갈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도 여행 일과를 기억하고 싶어서 나름 SNS에 기록해 두고 있었는데,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나 역시도 공항에 도착한 뒤였다.
수년이 지난 지금 궁금해진다. 그 애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지금의 고민은 뭔지. 또 어딘가에서 여행을 하고 잔돈 처리가 곤란하면 낯선 이들과 맥주를 나눠 마시는 호쾌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그리고 여행 이후에는 나와 함께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긴 했을지. 그저 잔돈 처리를 편리하게 해결해 준 한국인이었을지라도, 나름 재미있었던 순간인데 그렇게만 떠올린다면 섭섭할 것 같다. 물론 아예 기억도 안 나는 순간이라면 더욱 서운하겠지만. 그 아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그 애와 맥주를 마셨던 순간이 자주 떠오른다.
전역 후 모은 돈을 털어 떠난 일본 여행이였다.
삭제전역일이 다가오자 주변 사람들에게서 지겹도록 들은 ‘나가서 뭐 할거냐’는 질문. 처음엔 대충 얼버무렸지만, 어느샌가부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 답을 찾으려 고민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이룬 그렇다 할 업적도, 딱히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야망도 없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전역하고 나면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인생의 대단한 전환점도 아닌데…… .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면,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아주 오래 전,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예전이지만, ‘꿈’이 하나 있긴 했다. 사진작가. 신문에 실릴 기사 사진을 찍던 우리 할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동네 이곳 저곳을 다녔다. 그 시절 나는 할아버지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확히는, 발견하는 방법을 배웠다. 셔터 한 번에 필름 한 컷.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던 할아버지는 무명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직접 현상, 인화해 동네에서 작은 전시도 열었던, 맨 눈보다 네모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더 익숙했던 할아버지를 보며 피어난 꿈이었다.
‘그래,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는데……’
그다지 간절했던 적도, 이루기 위해 뭔가를 해본 적도 없었지만, 이때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었다. 사진작가의 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쳐보고자 새 장비를 장만하고, 남은 돈을 쪼개고 쪼개 한 달짜리 긴 여행을 계획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했지만 이제는 간단한 단어는 알아들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짧게 느껴진 긴 여행의 마지막 도시, 뻔하게도 도쿄였다. 익숙한 듯 낯선 듯,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크고, 정신없고, 바쁜 이 도시를 현대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방인의 시선에서 담았다. 그렇게 도시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셔터를 눌러대다 문득 깨달았다. 맞아, 나는 볕이 들지 않는 구석의 생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몰리는 도시 한복판의 관광명소보다, 그 옆 골목 구석의 탄탄멘 가게가 더 좋은, 그런 사람.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을 다시 흝어보며 숙소로 향했다. 카메라 장비가 워낙 고가였기에, 나머지는 전부 최저가, 그 중에서도 이 숙소는 유난히 싼 곳이었다. 내일 오후 비행기인데, 동전이라도 다 털고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왠만한 가게는 다 닫을 시간이었다. 어떡하지 싶던 찰나, 공용 로비 너머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어였다. ‘한국인이네, 내 또래이려나, 나보다는 조금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무슨 생각이였는지, 여행의 마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애한테 먼저 다가가서 동전을 처리하게 맥주나 마시자고 뻔뻔하게 말을 걸었다.
여행하며 한국인 관광객이야 수도 없이 봤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방금 만났지만 반가운 느낌.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유난히 솔직한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다시 만날 일 없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며칠 더 머무른다는 그 애에게 맥주를 사고 남은 동전도 다 주고, 나는 그렇게 긴 여행을 마쳤다.
어느새 나이 앞 자리가 바뀔만큼 몇 년이 지났다. 사진작가는 되지 못했다. 그냥, 평범한 직장인. 반복적이고 별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나이 말고 달라진 게 있다면, 퇴근길에 맥주를 사러 간 편의점, 냉장고 속 그 날, 그 애랑 마셨던 그 일본 맥주가 보일 때마다, 문득 그 날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맥주를 사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그 애는 여행을 마치며 내가 준 엔화는 어떻게 처리했으려나, 나처럼 그 순간을 종종 기억하려나. 딱히 기억 못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살짝 섭섭할지도. 어쩌다 마주치게 된다면 알아보긴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하루를 잊기 위해 맥주를 사고 마시면서는 의미없는 고민만 했었는데. 그 애가 바꿔놓은 내 일상의 한 구석이 꽤나 마음에 든다.
돌아가는 건지, 돌아오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삭제도망치듯 떠나 결국 다시 여기, 한국. 지금 나를 맞이하는 건 오직 낯선 모국어 뿐이야.
12년 전,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듯 떠난 곳이 너의 나라, 일본이었어. 네가 그랬듯 나도 이방인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공평한 것일 테니까 말이야.
일본에 도착해 첫 5년간, 네 덕분에 익숙해진 일본어로 한국인들은 거의 오지 않는 작은 숙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어. 이곳에서 나의 언어는 일본어와 영어뿐이었어. 한국어는 쓸 일도, 쓸 필요도 없는 곳이었지. 나의 국적이 흐릿해지는 순간에야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어.
기억나? 내가 도망치듯 그 숙소를 그만둔 날 말이야.
그날은 한국인 2명이 체크인을 한 아주 이례적인 날이었는데, 그중 먼저 체크인을 한 남자는 카메라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들어왔어. 난 자연스럽게 내 자리 앞에 놓여 있는 필름 카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지. 카메라를 쓸 줄도 모르는 나에게 네가 남겨준 유일한 것. 물론 네가 떠나는 날, 너희 가족들 몰래 내가 챙긴 거지만.
사실 카메라가 찰칵하고 찍히는 소리는 여전히 그날을 떠올리게 해.
'총기 사고로 일본인 남성 유학생 1명 사망, 20명 이상 중경상.'
15년 전, 대대적으로 기사가 났던 그 사건. 내 눈앞에서 쓰러지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하나둘 쓰러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던 그날의 공기가. 너희 가족들이 너를 데리러 한국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냥 너를 친한 친구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어.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군대로 도망쳤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지. 너는 더 멀리 떠났는데 나는 왜 그조차도 버틸 수 없을까.
"いいカメラですね!" (좋은 카메라네요!)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하는 남자에게 나는 그냥 웃어 보였어. 그 남자는 내 카메라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더니 "아니야, 됐다." 하고 뒤돌아섰어.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 남자는 다른 한국인 투숙객과 함께 한잔하고 들어오는지 볼이 발그레해졌더라고.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소속감이 저런 걸까? 쾌활하게 웃는 그들의 표정에선 자연스러움이 느껴졌어. 무엇도 숨길 필요가 없는 편안함 같은 것. 그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들의 수많은 여행 중 하루였을 그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나의 모국이었던 곳, 그곳이 여전히 나에게 모국일까?
나는 너를 잃었던 그때처럼 그냥 그 상황을 빠져나오는, 딱 그 정도로만 도망쳤어.
이상한 건, 멀리 떠날 용기도 없는 그 비겁함이 날 계속 살리게 됐다는 거야.
사람들 안에 끼지 못하는 이방인.
삭제너의 나라 일본과 내 나라 한국.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너의 카메라.
그때나 지금이나 도망치는 중인 나.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은 왜 여전할까?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불현듯, 기억은 마치 한번도 사라진 적 없다는 듯이 그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더라.
"혹시... 당근이세요?"
"예?"
"아, 아니세요? 카메라 당근하시러 온 거 아니에요?"
또 나타났다, 카메라.
"아닌데요."
"엇, 죄송합니다."
커다랗고 무거운 고급 카메라 장비를 지고 있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내가 지나가다 보기에도 카메라에 관심이 있어보이는건가? 어디 내 얼굴에 써있기라도 한가. '카메라와 관련된 사연 있는 남자'라고.
"괜찮아요. 근데 엄청 좋아보이는 카메라인데 다 파시는건가봐요."
"네, 사진가 되겠다고 나름 모으고 모아서 사다보니 이렇게 좀 일이 커지긴 했는데... 이제 사진도 잘 안 찍고 아직 작동은 하는데 놔두긴 아깝기도 해서요. 카메라 관심 있으신가봐요."
"아뇨, 사용할 줄 몰라요. 그냥 제 친구가 카메라를 좋아해서..."
"그러시구나. 카메라 관심 갖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저도 그놈의 사진가 꿈타령하느라고 진짜.. 장비에 돈도 많이 쓰고 일본여행도 막 사진 찍겠답시고 일부러 다니고 그랬거든요."
또 나타났다, 일본.
"일본이 사진 찍기가 좋은가보죠?"
"그냥 가깝고 감성 있어보이니까 간거죠. 카메라 사느라고 진짜 거지 여행이나 다름 없었어요. 제일 동네 구석 게스트하우스 겨우 뒤져가지고 잠만 자고 동전 탈탈 털어 삼각김밥이랑 맥주나 겨우 먹고. 그 사진들 다 아깝긴 하네요."
불현듯, 드러나는 기억의 존재감.
잔뜩 짊어진 카메라 장비. 그리고 먼저 체크인한 한국 사람.
"엇... 그 혹시 뉴스카이홈...?"
"네? 뉴스카이홈. 어? 너 그럼 그 그 동전으로 맥주털이한 그 애?"
"어, 그게..."
"진짜야? 어 야. 반갑다. 무슨 이렇게 만나냐. 웃기네. 야, 잠깐만."
남자는 전화를 받고 몇 마디 하더니 나에게 얼른 카메라 거래를 마치고 오겠다고 여기 꼼짝말고 있으라 했다. 금방 다녀오겠다며. 아니, 저는 그 동전 털어먹던 그 애가 아니고. 그 동전 털어먹던 애랑 당신을 보고 부러움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도망자인데요. 다시 돌아오면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그 애가 나보다 훨씬 어릴텐데 이런 착각을 하다니.
"으악, 뛰느라 죽는줄 알았네. 와, 잘 살았어? 안 그래도 나 가끔 그 일본여행 생각나면 니 생각했었어. 궁금했는데. 그 때 멍청하게 연락처도 안 주고 받고. 하긴 그 때야 뭐 그런 생각을 못할 때였기도 했지. 카메라 파는 날 만나는 거 진짜 기막힌 인연이네."
"아! 잘... 지냈죠. 잘 지냈죠.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이렇게 만나고."
아 큰일났다. 난 이제 도망 치는 내가 지겨우면서도 또 한 번 '동전을 털어 맥주를 같이 마셨던 그 애' 그림자 뒤로 도망치고 만다.
나도 한 번은 누군가랑 연결된 끈을 가지고 싶어.
필름카메라가 아니라 고급카메라로. 총소리가 아니라 반가운 인사로. 너의 나라 일본이 아니라 그저 여행지로. 바꾸고 싶어.
"그래서 너 지금은 무슨 일 해? 그때는 무슨 여행작가가 되겠다 그랬나. 지나서 말이지만 진짜 웃겼다. 맥주 조금 먹고 취해가지고서는."
"저... 그 이후로 일본에서 살았어요. 그랬다가 얼마 전에 다시 귀국했어요.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오 그래? 일본에서 일했어? 그게 더 멋지다. 나는 사진작가는 안되더라고. 지금 그냥 일해. 그냥 직장인. 아 진짜 반갑다. 어 오늘은 연락처 교환하자. 제대로 된 밥도 먹고 비싼 술도 한 번 먹자."
"네, 좋아요. 저기 근데, 어떻게 저..를 아직도 기억하세요?"
"어떻게 잊어. 그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잊어. 그 일이 있었는데.”
삭제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기억하는 ‘그 애’는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다가, 내 얼굴을 보고 표정을 고쳤다.
“어? 왜. 너 설마 기억 안 나?”
목끝이 타들어 갔다. 도망치듯 살아온 시간들이 또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거짓말하면 편할 거였다. 그 애의 그림자 뒤에 숨으면, 또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목에 걸린 카메라 스트랩을 보니 내 가방 속 오래된 필름카메라가 떠올랐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말해보고 싶었다.
“저… 사실 저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일본의 숙소, 체크인 데스크, 필름카메라, 총성 이후로 멈춰 있던 시간까지.
말을 다 듣고도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와, 인연 진짜 복잡하네.”
“…죄송합니다.”
“뭘. 근데 잘됐다.”
“네?”
그가 카메라 가방을 툭 쳤다.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아니어도, 도망 안 치고 네가 직접 말했잖아.”
나는 처음으로 아무 나라의 이방인도 아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는 술 말고 밥부터 먹자. 그리고 네 얘기, 더 제대로 해봐.”
돌아온 누군가를 흉내내려다, 아주 늦게 시작하는 길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쭈뼛거리는 나에게 그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인근 밥집에 가자고 했다. 국밥 좋아해? 너무 아저씨 입맛인가? 라고 말했지만 국밥만 한 소울 푸드가 있을까. 냉큼 좋아한다고 답했고 어느새 우리는 인근 프랜차이즈 국밥집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넓찍한 매장, 드문드문하게 앉아 있는 손님들을 피해서 우리는 구석의 조용한 자리로 갔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외투도 벗지 않고 그가 물었다.
삭제“… 그래서 처음에는 왜 거짓말을 했던 거야?”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반응을 먼저 해주시니까… 처음에는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하긴 내 반응이 좀 빠르긴 했어. 그래도 이렇게 사실대로 용케 말해줬네. 고마워.”
막상 얼떨결에 식당까지 같이 오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앉자니 어색했다. 어쩐지 타인과 함께 앉은 식탁에서는 어색하고, 더 긴장되는 사람이 바빠지기 마련이다. 이렇다고 할 말을 꺼낼 재주가 없는 나는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며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기에 바빴다. 그는 그사이에 국밥 2개를 주문했다. 더 이상 세팅하거나 시선을 둘 곳이 없어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본에서는 그동안 뭐 하고 지냈던 거야? 계속 뉴스카이홈에서 카운터를 보던 거야?”
“아뇨. 거기는 그 이후로 몇 개월 더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 근근하면서 지냈고…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왔어요.”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글쎄요…”
확신 없는 꿈에는 이렇다 할 대답을 선뜻 하는 게 어렵다. 차라리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나 하고 싶은 게 있었던가?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던 나는 너와 공유했던 필름 카메라가 유일무이한 취미였었는데.
“그래도 카메라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사진관 쪽은 어때? 뭐 물론 사진작가를 하겠다 떵떵거려놓고서 직장인이 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관심 있어 보여서.”
“어디까지나 취미죠 뭐”
이 대화를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던 찰나, 각자의 앞에 아주머니가 국밥을 가져왔다. 김이 펄펄 나는 국밥을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휘휘 저었다. 그래, 뭐 연락처 교환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세상이 좁다고 해도 뭐 오늘 다 이야기하고 털어버리면 뭐 어때?
나도 말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돌고 돌아서 만날 인연이면, 그 도망치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나를 다시 이렇게 앞에 가져다 놓을 사건이라면, 뭐 이 정도는 그렇게 저질러도 될 것 아닌가? 내 눈앞에 있는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건 없건, 그럴 마음을 베풀건 아니건 그것까지는 내 마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자정까지만 영업하고 마감할 식당, 몇 없는 손님들. 나도 좀 이렇다 저렇다 한풀이 좀 해보자. 나름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저랑 소주 마실래요?”
그는 내 얼굴을 사뭇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삭제"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네."
"네?"
"뭐 거의 처음 본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소주까지 마시자고 그렇게 비장하게 말을 해."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있잖아. 내가 아까 말했던 그 일. 내가 아까 착각한 그 때 여행때 만났던 그 사람."
"네."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냐고 했지?"
"네."
"그 때 남은 동전 엔화 털어서 맥주를 막 먹고는. 막 마시지도 않았어, 조금 먹더니 취해가지고는 자기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쏟아내는거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가정사부터 시작해서 학교 다닐 때 힘들었던 거랑, 돈을 어떻게 모아서 일본을 왔고 뭐 그런 저런 이야기."
"네."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까 내가 그 애에 대해서 뭐든 다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 지금 여기서 그 애 얘기를 자세히 다 말해줄 순 없지만, 아무튼 힘들었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왜 그 날 거기서 나랑 만났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인연이구나 싶기도 하고. "
"..."
"그런데 그 다음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먼저 간다고 인사를 하는데 그 애가 좀 이상한거야."
"이상해요?"
"어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얘기를 다 오픈 한 게 쑥쓰러웠는지 후회가 되는건지 얼굴도 뭐 제대로 안 보고 성의없이 대답을 하더라고. 그 때 좀 어이도 없고 나도 당황스럽고 해서 대충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알겠더라."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내 눈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것 같은 사람한테 내 이야기를 한풀이 하듯 다 꺼내는 것. 그것도 나한테서 도망치는 방법이구나."
"도망치는 방법..."
"자기 딴에는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용기를 낸거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다 꺼내고 나니까 이제 자기를 아는 나를 다시 볼 수가 없었던거야."
"..."
"그래서 말인데. 술의 힘을 빌려서 나한테 네 이야기를 다 꺼내도, 결국 그것도 도망치는 거라는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한 번 선택할 기회는 줘야할 것 같아서. 살면서 한 번씩 그 때 생각을 해. 내가 그 애를 덜 민망하게, 덜 부끄럽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까, 하고. 적어도 이번엔 너한테 그래주고 싶다."
아, 나는 대체 언제까지 도망을 치려고 할까.
"그럼 도망 안치고 마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진짜 그 사람을 만나."
"아까 말했잖아요. 사고가 있었다고."
"그러니까. 가서 말해. 필름카메라도 다 돌려줘. 한국에서 도망치듯 일본에 가지 말고, 그 애를 만나러 일본에 가서 말해. 니 물건과 추억을 돌려주겠다고. 이제 내가 더이상 갖고 있지 않겠다고."
......
다시 일본행 티켓을 끊고야 말았다.
내가 아는 거라곤 15년 전 딱 한 번 가봤던 너의 집 주소뿐이었다. 여전히 너의 가족이 그 집에 살고 있을지, 이미 떠나버렸을지 알 수 없었다. 원래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행동이었으나, 그 사람과의 만남 이후 순간적인 충동이었는지, 묻어둔 진심이었는지 무작정 일본행 티켓을 끊는 용기가 생겼다.
삭제비행기 이륙 안내가 나오는 내내, 그 사람과의 만남을 다시 한번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무엇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을까. 그 사람이 반가워 한 사람이 비록 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10년 전의 스쳐 지나갔을 법한 하루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10년 전 너의 가족에게 나는 뭐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니 나를 기억이나 할까.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사실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낙담할 테지만- 그걸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3시간의 비행, 1시간의 열차, 그리고 다시 1시간의 버스. 너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15년 전 일본 여행 겸 너의 집으로 갔던 길이 마치 어제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넘어 너의 작은 동네, 그 안의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막상 집 앞에 왔는데도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괜히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다 문 앞만 바라보기를 1시간째, 필름 카메라만 문 앞에 두고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두려운 확신이 설 때쯤 나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훈.”
12년 만에 봤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던 너의 어머니였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나요?”
그녀는 내 말에 싱긋 웃고는 반갑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기다렸어요. 들어가요.“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오니 왜인지 너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늑하고 편안한 너만의 향.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이 집에서 혼자 지낸다고 말했다. 왜 동생이 있는 도시로 가지 않냐고 묻는 내 말에 그녀는 그저 어린 시절 네가 쓰던 물건을 보여주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녀는 너의 어린 시절 사진은 물론, 네가 좋아하던 장난감, 사소한 노트 하나까지도, 내가 알기 이전의 너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는 네가 마지막으로 쓰던 일기장을 내게 건넸다.
”남의 일기는 읽는 게 아닌 걸 알지만, 그땐 아이가 남긴 모든 걸 알아야 했어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읽자마자 이 일기장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지훈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우린 연락할 길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지훈이 연락하지 않을까, 혹시 한 번은 오지 않을까 해서 여기에 남아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수년 동안 주인 없이 떠돌던 카메라가 주인을 찾은 것만 같았다. 우린 함께 저녁 식사를 만들고, 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이라도 집을 나서야 숙소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 그녀는 편히 자고 가라며 오랫동안 비어있던 네 방을 내어주었다. 환영받는 마음이란 이런 걸까. 그 남자가 쏘아 올린 무모한 여정에서 원하는 대답을 얻은 것만 같았다.
캄캄하지만 잔잔한 어둠 속 눈을 감고서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곱씹었다.
”언제든 와도 돼요. 여기에 항상 있을 테니까요.“
돌고 돌아 내게 생긴 도망칠 구석은 너의 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긴 시간을 기다린 건 내가 아니라 너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너에게 돌아온 거야.
그리고 이젠 정말 내 삶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머니와의 대화는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나, 편의상 한국어로 작성하였습니다.
[끝]
내가 아는 거라곤 15년 전 딱 한 번 가봤던 너의 집 주소뿐이었다. 여전히 너의 가족이 그 집에 살고 있을지, 이미 떠나버렸을지 알 수 없었다. 원래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행동이었으나, 그 사람과의 만남 이후 순간적인 충동이었는지, 묻어둔 진심이었는지 무작정 일본행 티켓을 끊는 용기가 생겼다.
삭제비행기 이륙 안내가 나오는 내내, 그 사람과의 만남을 다시 한번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무엇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을까. 그 사람이 반가워 한 사람이 비록 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10년 전의 스쳐 지나갔을 법한 하루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10년 전 너의 가족에게 나는 뭐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니 나를 기억이나 할까.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사실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낙담할 테지만- 그걸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3시간의 비행, 1시간의 열차, 그리고 다시 1시간의 버스. 너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15년 전 일본 여행 겸 너의 집으로 갔던 길이 마치 어제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넘어 너의 작은 동네, 그 안의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막상 집 앞에 왔는데도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괜히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다 문 앞만 바라보기를 1시간째, 필름 카메라만 문 앞에 두고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두려운 확신이 설 때쯤 나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훈.”
12년 만에 봤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던 너의 어머니였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나요?”
그녀는 내 말에 싱긋 웃고는 반갑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기다렸어요. 들어가요.“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오니 왜인지 너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늑하고 편안한 너만의 향.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이 집에서 혼자 지낸다고 말했다. 왜 동생이 있는 도시로 가지 않냐고 묻는 내 말에 그녀는 그저 어린 시절 네가 쓰던 물건을 보여주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녀는 너의 어린 시절 사진은 물론, 네가 좋아하던 장난감, 사소한 노트 하나까지도, 내가 알기 이전의 너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는 네가 마지막으로 쓰던 일기장을 내게 건넸다.
”남의 일기는 읽는 게 아닌 걸 알지만, 그땐 아이가 남긴 모든 걸 알아야 했어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읽자마자 이 일기장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지훈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우린 연락할 길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지훈이 연락하지 않을까, 혹시 한 번은 오지 않을까 해서 여기에 남아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수년 동안 주인 없이 떠돌던 카메라가 주인을 찾은 것만 같았다. 우린 함께 저녁 식사를 만들고, 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이라도 집을 나서야 숙소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 그녀는 편히 자고 가라며 오랫동안 비어있던 네 방을 내어주었다. 환영받는 마음이란 이런 걸까. 그 남자가 쏘아 올린 무모한 여정에서 원하는 대답을 얻은 것만 같았다.
캄캄하지만 잔잔한 어둠 속 눈을 감고서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곱씹었다.
”언제든 와도 돼요. 여기에 항상 있을 테니까요.“
돌고 돌아 내게 생긴 도망칠 구석은 너의 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긴 시간을 기다린 건 내가 아니라 너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너에게 돌아온 거야.
그리고 이젠 정말 내 삶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머니와의 대화는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나, 편의상 한국어로 작성하였습니다.
[끝]
옆집에서 소리가 들려.
답글삭제마음과 달리 이사는 현실적인 부분이 많았다. 아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좋은 조건의 동네로 가는 것이 맞았지만, 좋은 조건의 동네로 간다는 것은 곧 지금의 집보다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인터넷 사이트와 생각해 둔 동네 인근의 부동산 근처를 서성이다가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삭제그렇게 돌아온 집은 허탈함만 가득했다. 상수는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남편과 자신만 사는 집이 아니다. 환경이 아이에게 중요하다는 건 그녀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고민 끝에 상수는 남편에게 말한다.
그녀의 남편 역시 아내의 말에 동의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가뜩이나 아내가 말하는 제안들은 밀가루를 퍼다 나르고 받는 돈으로는 택도 없는 곳이다. 밀가루를 퍼다 나르는 것 이상의 어떠한 노동, 혹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날마다 비명을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세상의 어두운 면은 되도록, 그리고 최대한, 아주 천천히 늦게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식에게는 이런 가난함도, 어두운 것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두 사람 모두 똑같았을 것이다.
비명소리가 여전히 끊이지 않던 어느 날 밤, 부부는 합심해서 최대한 타협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당장 이사를 할 돈은 없고, 옆집의 끔찍한 비명소리는 나날이 심해져 갔다. 상수의 남편은 일터 지인들에게 ‘정말 금방 갚을테니 돈을 조금만 빌려줄 수 있냐’며 연락을 돌렸다. 그 사이 상수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과외 일을 구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의 최선으로 여기저기를 수소문한지 일주일이 막 넘어갈 즈음이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옆 집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술병 깨지는 소리, 무언가 묵직한 것을 던지는 소리. 그리고 옆 집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 이 모든 소리가 뒤섞여 벽을 넘어 요란하고 생생하게 커져만 갔다.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소리에 상수와 남편은 아기를 꼭 지켜안고 애써 잠을 청했다. 그런데 문득, 소리가 사그라들고 아주, 많이 고요한 정적만이 밤을 채웠다. 상수네 가족은 정말 오랜만에, 불안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삭제상수는 당연하게도 옆 집 여자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고요함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상수는 옆 집에 가서 노크라도 해보길 원했지만 남편은 극구 반대했다. 그 난장판 부부 사이에 개입되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남편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신한 것은 해야만 하는 상수였기에,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 조심스레 옆 집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보려는 순간 문이 열렸고, 문을 열고 마주한 건 옆집 여자였다. 남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상수는 몰려오는 무거운 공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야윈 여자의 얼굴엔 두려움과 체념이 가득했고, 불안해 보이는 움직임과 눈빛에 상수는 아무 말 없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삭제쿵. 쿵. 쿵. 쿵.
상수는 이게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계단 너머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소리가 자신과 그 여자를 향하고 있는 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여자와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일 것이라는 것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상수가 말을 고르는 사이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뗐다.
“미안해요. 이제 시끄럽지 않을 거예요.”
“괜찮아요?”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순간 상수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고,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시린 미소만 띠었다. 그때 발걸음 소리의 주인들이 그들 앞에 가닿았다.
“경찰입니다.”
“여기예요.”
경찰들과 과학수사라는 글자가 박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상수와 여자 사이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옆집 여자도 상수에게 짧은 목례를 하고는 문을 닫았다. 상수의 손에 들린 수박 몇 조각 위로 날파리들이 날아다녔다.
다시 집에 돌아온 상수는 단내를 풍기는 수박을 바닥에 내려다 놓고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밖에선 경찰이 여자에게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치이이익 하는 테이프 뜯는 소리가 들렸다. 뉴스에서만 보던 그 노란 테이프가 옆집에 붙어있을 생각을 하니 상수의 정신은 더 아득해져만 갔다.
그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들어오자마자 상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삭제"옆 집 왜 그래? 왜 막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고 앞에 경찰차는 또 뭐야."
"아까 낮에 경찰들이 와서 여자를 잡아갔어. 무슨 일인지는 안 알려주던데..."
"여자? 여자를 잡아갔다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응. 아까 내가 봤거든."
"그럼 설마 ..."
상수와 남편은 자신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킨 그 '설마'의 일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곧 그 다음날부터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지금껏 상수와 남편을 괴롭혀오던 옆집의 소리는 없어졌지만 새로운 소리들이 나타났다. 카메라 셔터 소리, 옆집을 드나드는 경찰들의 발자국 소리, 이따금씩 집 초인종을 누르고서는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
이제는 진짜 이 집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더 안좋아지고 말았다. 험한 사건이 일어난 집의 옆집이라는 이유로. 이 집은 당분간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우니 집주인이 당신들을 쉽게 내보내주지 않을거 같다는 부동산 아줌마의 말에 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상수와 남편은 일을 더 늘리고 아득바득 살았다. 집에 있을 시간이라고는 잠자는 시간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건이 정리되었는지 옆집에 붙어있던 노란테이프도 떨어지고 사람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텅 빈 옆집에서는 당연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수와 남편은 옆 집에서 소리가 나는지, 안 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본인들의 집보다 일하러 나가 있는 시간이 길었다.
.
.
.
"저기, 여기 희망부동산인데. 혹시 아직도 집 알아보고 있어요? 월세가 괜찮은 게 나왔는데 한 번 보면 어떤가 싶어서 전화했어요. 집주인도 이제는 좀 걱정이 덜어졌는지 이사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던데? 기간도 얼추 됐고."
"오후에 바로 보러 갈게요."
상수는 곧바로 남편에게 연락했고, 남편도 약속한 시간에 맞춰 부동산으로 왔다.
상수와 남편은 그간 무리해서 일하느라 처음 만났을 때의 반짝임과 신혼생활의 설레임은 바랜지 오래였지만, 희망부동산 앞에서 그들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새로운 집을 구하는 조건들은 이전과 다 똑같았다. 새로 추가된 중요한 조건 하나는, 방음이 잘 되는 집일 것.
부동산 아줌마를 따라나선 상수와 남편은 두 사람 앞에 높게 펼쳐져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한참을 가만히 서있자 부동산 아줌마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삭제"좀 높긴 하죠? 그래도 동네도 조용하고, 한 번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오래 살아요."
오래 사는 걸까, 오래 살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 상수의 머릿속을 스쳐지났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상수는 옆집 여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시끄럽지 않을 거예요.'
희망은 왜 언제나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저 윗편에 있는 것일까.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오를 때마다 도시의 소음이 점점 잦아졌다. 상경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저 아래의 도시가 왜인지 낯설게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옆집의 소음조차 위에서 바라볼 땐 아무 의미 없어보였다. 허무와 안도가 뒤섞인 오묘한 기분에 상수는 다시 자신 앞에 남아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꿋꿋하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끝]
거짓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답글삭제내가 기억하는 아주 오래된 첫 거짓말은 양치질은 아까 다 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린아이의 그런 거짓말쯤은 아주 쉽게 간파해내는 어른이었고 물기 없이 말라있는 칫솔을 들고 와서 나를 엄청나게 혼냈다. 그때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의 온도를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보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더 쉬운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나는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여전히 엄마는 속이기 쉽지 않았지만.
삭제본가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되니 그래도 조금 뻔뻔해질 수 있었다. 집은 깨끗하게 치웠냐는 물음,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는 물음, 공부는 잘 하고 있냐는 물음, 술 마시고 늦게 다니는건 아니겠지 하는 물음에도. 어쩌면 엄마가 그냥 속아넘어가줬던것일지도 모르는 거짓말을 나는 점점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거짓말을 잘 하게 된 것일지도.
그렇게 잘하게 된 거짓말들이 하나 둘 모여 어느새 내 안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내 안에 서식 중인 거짓말들의 주식은 주로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수많은 패배감, 증오, 질투, 연민, 고마움, 미안함이라는 감정들이었다.
삭제내가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거짓말들은 점점 통통해져만 갔다. 역설적이게도 거짓말들의 삶이 윤택해질수록, 내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거짓말들은 처음엔 작은 세포였지만, 점점 커져서 이제는 나만 한 친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힘이 강해진 거짓말은 나와 비슷한 외형을 갖춰나갔고, 어느 날은 내가 힘들다고 하니 자기가 나 대신 하루를 시작해 주겠다고까지 말을 해줬다. 어딘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너무 쉬고 싶었기 때문에 거짓말에게 내 삶을 조금씩 내어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거짓말 친구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만큼 커지게 되면 나 대신 인간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다고.
소문이 돌자 더 많은 거짓말들이 내 감정을 앗아가고 그 감정을 먹이 삼아 몸집을 키우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나 대신 하루를 시작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나중엔 웨이팅도 생겨 캐치 테이블로 내 하루를 장악하기 위해 다들 아침마다 난리가 났다.
그러던 중 일이 터져버렸다.
모든 것으로부터 너무 지쳤던 그날, 처음으로 거짓말에게 나의 하루를 내어준 날이었다. 외형은 나와 다를 바 없이 커버린 그 아이는 별일 없을 거라고 내게 굳게 약속하고서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삭제간만의 휴식이었다. 5분 단위로 맞춰두었던 모든 알람을 끄고 다시 늘어지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느지막이 배달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시계는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손 하나도 까딱하기 싫은 그런 날이었다. 배달 음식을 다 먹었을 때쯤 어딘가 스스로를 포기했다는 생각에 묘한 패배감이 들어 울렁거림이 일었지만 이미 거짓말을 세상에 내버린 나로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 애가 정말 말 그대로 무사히 돌아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둑어둑해지고 나서 저녁을 어찌할지 고민할 때쯤 거짓말이 돌아왔다. 나는 그 애에게 어떻게 나 대신 하루를 보냈는지 물었다.
그때 그 애는 평소 내가 하던 대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정시가 시작되기 전에 커피를 타 오던 내 습관을 그대로 따르고, 동료들과 적당하고 건조한 대화를 나누다가 아무 일 없이 퇴근했다고 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조차도 힘이 들었던 나는 그 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흘려들었다.
분명 나한테는 그렇게 말했는데, 사실은 그것조차도 거짓말이었던 거지.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그 소문의 주인공이 나임을 알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평소 잘 보지 않던 내 사내 메신저함이 신경 쓰였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메신저 아이콘 위에 숫자 하나가 떠 있었다.
삭제1.
별 것 아닌 숫자인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졌기 때문일까. 내가 탕비실에 들어서면 대화가 끊겼고, 팀장은 나를 볼 때마다 무언가 참고 있는 얼굴을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메신저를 열자 인사팀 박 과장의 메시지가 보였다. 첨부파일 하나와 함께.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가능하실까요?”
파일 속에는 사내 익명 게시판 캡쳐본이 들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아니, 거짓말은, 댓글을 달고 있었다. 실명을 언급하며. 팀장 이름, 앞자리 동기 이름, 심지어 다른 부서 사람 이름까지.
처음에는 단순한 허세 같았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상해졌다. 거짓말은 마치 오래 참아온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증오와 열등감과 모멸감이 뒤섞인 채로. 내가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짧았다.
“근데 이제 곧 다 끝이야.”
작성 시간은 새벽 2시 14분. 그 시간, 나는 자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 끝난다는 게 뭘까. 회사 생활? 인간관계? 그 순간 메신저 알림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가 없었다. 시스템 오류인가 싶어 클릭해 열어봤다. 이상했다.
“재밌었지?”
발신자는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쳤다.
“…누구세요?”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네가 먼저 나를 만들었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사무실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키보드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그런데 나만 다른 공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모니터 화면 아래 검은 부분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피곤하고 창백한 얼굴.
그리고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화면 속의 내가 웃은 것 같았다.
나는 웃고 있지 않았는데.
[끝]
여기는 17층.
답글삭제3년 전, 높아도 20층 이상이 없는 이 작은 도시에 40층짜리 아파트가 생긴다는 말이 나올 때부터 도시가 들썩였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나 뭐라나. 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과시욕에 눈이 먼 것이라고, 그렇게 높은 곳에 살면 위험해서 어떡하냐는 말을 어딜 가든 들을 수 있었다. 뭐, 나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아파트의 17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삭제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부러움과 경멸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그런 눈빛을 즐겼다. 바깥세상에서는 이 아파트의 모두가 한 편처럼 보였겠지만, 로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이 아파트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를 반으로 가르는 바로 저 엘리베이터들. 2층에서 20층까지만 서는 하층부 엘리베이터와, 21층에서 40층까지 서는 상층부 엘리베이터 말이다.
상층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하층부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야만 하는데, 이상하게 하층부 사람들은 상층부 사람들이 지나갈 때 괜히 하던 말을 그만두고 딴청을 피우거나 눈을 내리까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을 제외하고. 이 아파트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6층, 11층, 14층, 그리고 나, 17층, 이렇게 넷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고, 나는 친구들이 다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나는 이 그룹에서 언제나 결정을 내렸고, 모두가 내 의견에 동의했으며 그들은 언제나 내가 가진 걸 똑같이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평화가 깨진 건 바로 그날, 21층에 전학생이 이사 온 그날부터였다. 처음 그 애를 본 건 학교가 아니었다. 쌍둥이 빌딩처럼 서 있는 이 통창 아파트에서 반대편 건물에 거울처럼 비쳐 보이는 그 애의 모습이었다. 소나기가 내리려는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져 창밖을 올려다보는 순간,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보던 그 애도 반대편 건물에 비친 나를 발견했다. 그 애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순간 난 눈을 피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창문에서 살짝 떨어져 한층 한층 세어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17층. 저기는 18, 19, 20, ... 21층. 상층부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를 갔을 때 그 애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친구들이 있는 곳에 먼저 다가온 그 애는 "어제 너 맞지?"라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밝고 쾌활하고, 아니야, 거칠 것이 없는 저 거만한 태도. 나는 그 애가 거슬렸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그 애는 나에게 잘해주었다. 그 애는 곧장 우리의 무리에 합류했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결정권은 그 아이에게 넘어갔다. 언제부터 내가 갖고 있기라도 했냐는 듯이.
삭제그 아이는 무리 속에서도 유독 나에게 잘해줬는데, 본인 다음으로 높은 층수에 사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 아이의 행태를 살펴봤을 때 14층에 사는 친구랑 더 친한가? 생각해 보면 6층에 사는 친구랑 좀 더 친했던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왜? 자신을 처음 발견해 준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더 싫어진다. 하여간. 그 아이가 사고 싶은 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사고 싶어 했고 (나도 그래지만..) 그 아이가 소비하는 콘텐츠는 어느샌가 모두가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가끔 내 취향은 그 아이와 충돌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그 아이는 로맨스를 좋아하는데, 나는 스릴러나 액션 영화에 더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옷이나 액세서리도 마찬가지다. 마냥 러블리한 것보다는 단정하고 깔끔한 옷이 좋은데, 어쩐지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그 아이의 물건을 갖고 싶은 것처럼 굴어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느새 구매해서 자랑스럽게 인증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점점 현타가 오던 어느 날이었다.
6층에 살던 소영이가 가족 여행을 다녀와 기념품이라며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모양의 키링을 선물해주었다. 연두색과 진한 녹색의 나뭇잎이 번갈아 칠해져있는 네잎클로버 모양 키링이었다. 모두 고마워하며 가방에 잘 넣은 뒤 각자 헤어지는데 21층의 그 애, 지아와 나만 같이 집 쪽으로 걸어왔다.
삭제"네잎클로버는 너무 좀 애 같지 않아?"
다른 친구들이 사라진 걸 모두 확인하자 보민이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진짜 다들 마음에 들어서 고맙다고 하는 거 아니지?"
"..."
"걔 가끔 엉뚱하다 싶긴 했는데 센스가 없어서 그런거였네."
"왜 그렇게 말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뭐가?"
"애 같아서 싫고 센스가 없는 선물이라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아까 얘기하지 그랬어. 아까는 니가 제일 먼저 고맙다며."
"에엥. 야 왜 니가 화를 내."
"아님 그냥 내 취향은 아니네까지만 하면 되지. 사온 사람 무안하게 센스가 없니 뭐니. 그리고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
"뭐래. 어이가 없네. 뭐 맘에 안든다 말도 못하냐?"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 애를 바라보다가 그냥 먼저 뒤돌아 다른 곳으로 쿵쿵 걸어갔다. 후회하게 되겠지. 참다 참다 속에 있던 말을 뱉어버린 걸 당장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머리를 싸매고 후회하게 되겠지만 앞만 보고 걸었다.
다음날, 소영이는 키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다시 돌려주라며 기어코 네잎클로버를 나에게서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모두 상층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나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괄호 부분은 글의 일부는 아니고, 제가 이해를 정확하게 한 것인지 확실치 않아 사전에 덧붙여 둡니다..! 혹시 지아와 보민이가 동일인물(21층에 사는 전학생)이 맞나요? 저는 동일인물로 이해했고, '지아'로 통일하여 글을 이어 쓰겠습니다.)
삭제'걔넨 윤지아네 집에 갔겠지?'
집 문을 열려는 찰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슬쩍 옆을 쳐다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차마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졌다. 맑은 날일수록 건너편 건물에 잘 비쳐 보이는 21층의 집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나는 비상구 계단을 통해 다시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왜 다시 1층으로 내려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집 안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아는데도, 나는 무방비한 로비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비상구에서 로비로 튀어나오자마자 건물 밖 벤치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소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를 빤히 쳐다만 보았다. 자동문이 몇 번을 열리고 닫히는 동안 나는 소영이에게로 다가가지 않았다. 다시 올라가야 할지, 밖으로 나가 소영이의 옆에 앉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내가 소영이에게 들킨 것인지, 소영이가 나에게 들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소영이를 지나쳐 최대한 빨리 뛰기 시작했고, 소영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보다 내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때쯤 시멘트 틈새에 걸려 결국 넘어져 버렸다. 눈물이 난다는 게 느껴지자 꾹꾹 눌러담았던 서러움이 기어코 비집고 나왔다. 아파트 단지가 다 울릴 정도로 엉엉 울고 있던 내 앞에 네잎클로버 그림자가 비쳤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운동화 끝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 옆으로 연두색과 진초록색이 번갈아 칠해진 네잎클로버가 흔들렸다.
삭제"야."
소영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꽉 막혀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소영이는 쭈그려 앉아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어제 빼앗겼던 키링이 놓여 있었다.
"돌려주려고 했어."
"...왜 가져갔는데."
"지아가 싫다고 해서."
그 말에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근데 웃긴 거 알지?"
소영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걔가 싫다니까 다들 싫은 줄 알았어. 근데 집에 가서 보니까 나만 서운한 게 아니더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4층도 가방에 달았고, 11층도 책상에 걸어놨대. 그냥... 걔 앞에서만 말 못 한 거지."
바람이 불어 키링이 달랑거렸다.
"너도 그렇잖아."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별로 안 좋아하면서 좋아하는 척한 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언제부터 저 층수 놀이 하고 있었을까."
멀리서 아파트가 보였다. 17층과 21층의 창문이 햇빛을 받아 똑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높은 층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사는 삶이 너무 편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편안함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것이었다는 것도.
이불정리가 싫다.
답글삭제청소기 돌리기도 싫다. 설거지도 싫다. 냉장고 청소도 싫다. 창틀 청소도 싫다. 분리수거도 싫다. 빨래도 싫다. 이건 너는 것도 개는 것도 둘 다 싫다. 화장실 청소는 진짜 제일 싫다.
삭제저 싫은 일들을 오늘 내가 다 해야한다. 왜냐.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시켰기 때문에.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에게 미룰지도 모른다. 벌써 일주일째 그러고 있으니까. 혼자 살면 좋을줄만 알았지. 해야 하는 것들은 다 싫은 일들뿐이고 하고 싶은 것들은 다 돈 드는 일들뿐이다. 잘 살아보고 싶어서 혼자 살겠다고 나온건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잘 해보려던 마음도 없어졌고 엉망진창이다. 누가 성공하고 싶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정리부터 하라던데 그냥 성공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래도 저 커피만이라도 좀 치울까.
밖에 나갔다가 테이크아웃해서 집으로 들고 온 저가 프랜차이즈 커피들이 줄지어 서있다. 우리 집에 정리되어 있는건 저 커피들밖에 없네. 남은 커피들을 싱크대에 버리고 컵홀더, 빨대는 버리고 플라스틱컵을 치우다 보니 커피에 가려져 있던 약봉지가 눈에 띈다.
.
.
.
"아무래도 약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시작은 아주 약하게 드릴테니 한 번 드셔보세요. 간혹 너무 속이 메스껍거나 어지럽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긴 한데 보통은 처음엔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들 많이들 이야기 하세요. 적응하려면 짧게는 3일, 길게는 2주 걸리기도 해요. 그래도 잘 맞으면 진짜 평소에 좀 편하실거에요. 술..은 아무래도 좀 줄여보시고, 하루에 10분이라도 햇빛 맞으면서 걸어보세요. 음.. 그러면 우선은 1주일 약 드셔보시고 다시 오시는 걸로 할까요?"
...해서 약을 받아온 게 3일 전.
약 먹기 싫다. 하루에 10분 걷는 것도, 햇빛을 보는 것도 싫다. 일주일 뒤에 다시 병원을 가야하는 것도 싫고, 약 먹었다가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싫다.
술만 좋다.
'지잉-.'
[약 먹고 있지? 어때, 부작용은 없는 거 같아?]
제발 자기를 생각해서라도 상담도 받고 약도 먹어보자던 도민이는 아침마다 문자를 보낸다. 어제 내가 이 문자에 답장을 했던가? ...답장도 하기 싫다.
'지잉-.'
[진짜 나도 마지막이야. 너 약 제대로 안 먹으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너 안 볼거야.]
'지잉-.'
[연수야. 부탁이다 정말.]
'지잉-.'
[내가 미칠 것 같아서 그래.]
알았다는 문자를 보내고 곧바로 나는 약을 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잤다. 아니, 누워있었다.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한 묘한 감각을 느끼며 뒤척거리다 어느 순간 눈을 떴다.
내 눈 앞에서 도민이가 울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니 병원이었다. 도민이는 알았다는 내 문자에 곧장 우리 집으로 왔고, 집에 들어왔을 땐 이미 일주일 치 약을 털어먹은 채 침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약이 세진 않아서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술과 함께 먹은 게 문제였다.
삭제“그러니까 내가 널 혼자 못 두는 거야.”
도민이의 말에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고, 간호사가 내 혈압을 체크하는 동안 의사가 물었다.
“어지럽진 않으세요?“
내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도민이 먼저 의사에게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간호사는 잠깐 문쪽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아니, 괜찮지 않으니까 이렇게 병원에 왔겠지만.”
그녀의 말에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간호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자 간호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 현지야. 청하대 병원 입사 동기… 기억 안 나?”
“아, 응... 기억나.“
현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병동 동기였다. 몽롱한 정신에 길게 대답하지 못하자 현지는 문밖을 몇 번 의식하고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너 너무 급하게 그만둬서 다들 놀랬어. 얼마 만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그 말이 이상하게 도민과의 첫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병원에 입사했을 때 도민은 레지던트 3년 차였다. 실수를 하면 내가 깨닫기도 전에 어느새 고쳐져 있었고,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에도 당황하는 사이 도민이 이미 상황을 해결해버렸다. 그게 좋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보고 있다는 게, 그때는 그냥 좋았다.
차가운 주삿바늘이 느껴져 움찔하니 현지가 내 팔을 살짝 잡고는 다시 채혈을 시작했다.
“근데 저 사람, 전에 우리랑 같은 병원에 있던 김도민 선생님 맞지?”
그때 도민이 문을 열자 현지는 동기에서 다시 간호사로 돌아갔다. 이내 침묵을 지키던 현지는 채혈을 마치고 곧장 밖으로 나갔고, 나는 현지가 병실 문의 작은 창문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도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울었던 얼굴로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삭제“연수야.”
그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견디기 힘들었다. 병원 복도 소리, 링거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카트 바퀴 소리 사이로 도민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너... 진짜 죽고 싶었던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고 싶었던 건지, 그냥 며칠만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누가 좀 발견해주길 바랐던 건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도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 네 문자 받고… 진짜 무서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대신 나는 그저 천장만 바라봤다. 새하얀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도민이 조용히 내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나 좀 믿으면 안 돼?”
손등 위로 닿은 체온이 뜨거웠다. 나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약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너무 지쳐서인지 도민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믿는 거랑 버티는 건 다른 거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도민이 잠시 말을 잃었다. 한참 뒤에야, 아주 조심스럽게, 작게 되물었다.
“그럼 넌 지금 뭘 하고 있는데.”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병실 창문 너머로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병원은 늘 이상한 냄새가 난다. 소독약 냄새, 약 냄새, 사람 사는 냄새.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아직도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넌 지금 뭘 하고 있는데.’
삭제그러게. 나 뭐 하고 있지. 도민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더라? 분명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먼 산골짜기에서 어떻게든 잘살아 보고 싶어서 올라온 나였는데. 가방끈 길지 않아도 되니까 여기서 농사 같이 짓자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될까봐 엄마는 그렇게 나의 상경을 만류했던 걸까?
어딘가 차갑고 쌀쌀맞은 서울 생활을 잘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묘하게 나보다 빠릿빠릿하고, 늘 똑똑한 선택을 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잘 버티고 대학교 졸업장을 따냈다. 어떻게 시험도 치고 자격증도 따고 나답지 않은 자아를 지우고 그럴싸한 말을 하니 간호사가 되어 있었다.
간호사하면 늘 따라다니는 단어, ‘태움’. 이미 여러 간호사 커뮤니티, 그리고 간호사 커뮤니티가 아니더라도 곳곳의 사이트에서 익히 들었던 터라 큰마음은 먹고 있었다. 물론 마음을 먹는 것과 다르게 실제는 더 끔찍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는 선배들 때문에 힘들었다. 아니, 선배들이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저런 게 선배라니.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고 되새기며 꾸역꾸역 버텼던- 그래도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민에게 내뱉은 것처럼, 믿는 것과 버티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어느 순간 버티는 것도 버거웠고, 버티는 것이 버거우니 믿음에 금이 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당장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산골짜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건 나보다 나를 잘 보고 있는 도민이 있어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 눈물부터 주룩주룩 났다. 낮이건 밤이건, 길 가다가 사연 많은 여자처럼 눈물이 나기 일쑤였다. 지하철에서 누군가는 안쓰럽게, 누군가는 미친 사람처럼 쳐다봤다.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었다.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간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떵떵거리던 그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서울에 대한 환상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 농사나 편하게 짓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비집고 올라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농사보다도 그냥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이 시점부터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글에도 지문이 있잖아
답글삭제내가 쓰는 모든 대사에는 버릇이 있었다.
삭제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끝내 붙잡지 못한 채 무대의 막이 내린다. 사람들은 그걸 ‘절제된 비극’이라고 불렀고, 어떤 평론가는 상실을 다루는 방식이 집요하다고 적었다. 몇몇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이름을 가린 예명 아래로 제법 괜찮은 평가가 따라붙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사실 굳이 고칠 생각이 없기도 했다.
내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극을 쓴 지도 어느덧 5년째였다. 언론 인터뷰도, 관객과의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극작가란 원래 작품 뒤에 숨어도 되는 직업이었고, 나는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얼굴 없이도 무대 위에 흔적만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그 날도 나는 내 신작 공연의 마지막 회차를 맨 끝 줄 객석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커튼콜이 끝나고 박수가 잦아들 무렵,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친한 피디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매거진 리뷰 봤어? 너 이번 공연 꽤 세게 깠던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가 보낸 링크를 눌렀다. 요즘엔 혹평도 홍보가 되곤 하니까.
화면 상단에는 공연 전문 매거진 제목과 리뷰 헤드라인이 떠 있었다.
〈지문을 감추는 사람의 대사〉
제목에서부터 손이 멈췄다.
‘...어?’
나는 아주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는 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방식으로 장면을 끝낸다. 붙잡지 못한 사람, 늦게 도착한 사과, 말해지지 않은 진심. 대사는 달라졌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어떤 글은 이름을 바꿔도 지문을 숨기지 못한다.’
너무도 익숙한 문장이였다.
‘지문’.
그 단어를 저런 식으로 쓰는 사람을 나는 한 명밖에 몰랐다.
오래 전, 같은 학교 극작과 건물 복도에서 나와 가장 크게 싸웠던 사람. 공연을 만들던 나와 공연을 읽던 그는 늘 같은 작품을 두고 아주 다른 말을 했다. 나는 쓰는 사람이었고, 그는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말은 너무 정확해서 자주 상처를 냈다. 우린 작품 하나를 가지고도 며칠간 의견을 치열하게 주고받았다. 나는 내심 그게 즐거웠다.
졸업 공연을 올릴 때쯤이었다. 그는 내 대본을 읽고 긴 비평 하나를 썼다. 늘 그렇듯, 다른 작품에게처럼, 그에게 있어 글은 곧 칼이었다. 나에게만큼은 다정한 비평을 써줄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나도 나의 칼을 들었다. 우린 서로 어느때보다 깊게 서로를 찔렀다. 그 날로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떠났고, 우린 붙잡지 않았다.
그 때의 기억을 곱씹으며 한동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다가 결국 매거진 하단에 적힌 필자 이름을 눌렀다.
공연 비평가 A.
역시. 예상한 이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충동적으로 매거진 편집부에 짧게 메일을 보냈다.
‘비평 잘 읽었습니다. 글쓴이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음 날 오전. 편집부에는 다소 심란한 얼굴의 디렉터 B가 앉아 있다. 짧고 간결한 메일. 독자의 요청일까? 혹은 업계 관계자의 요청일까? 아니면 이 낯선 이름이 어쩌면 극작가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디렉터 B가 아닌 공연의 극작가의 이름과는 달랐다. 그러면 독자 혹은 업계 관계자일 텐데.
삭제점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팀원이자 늘 골치 아픈,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사랑하는 비평을 쓰는 A를 지켜야 함과 동시에 어떤 처세를 하는 게 제일 좋을까?
따지고 보면 별일 아닌데, 이렇게 자신을 골몰하게 만드는 A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입사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A의 글은 어딘가 군더더기 없으면서 날카롭다. 때로는 너무 아릴 정도로.
B는 A의 첫 원고를 읽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동안 피드백 해오던 팀원들의 원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날이 서려 있었다. 아프기도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맥락을 과감하게 짚어내는 A였고, B는 얼마 지나지 않아 A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A의 글은 존중해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엔 예외였다. 조금은 보수적으로 접근해도 되지 않나? 게시물이 업로드되기 전날, B는 A에게 꼭 이 원고를 올려야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글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공연에 이런 비평을 쓰는 것도 매거진 입장에서도 나름 고심해 볼만한 문제였다. 하지만 A는 한사코 꼭 올려야겠다고 했다.
“혹시 몰라요? 작가가 직접 보고 연락해 줄지.”
…그 사람이 그렇게 한가로울까? 갓 입사한 A의 말은 그다지 B에게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았지만, 더 이상 A와 입씨름하기 싫은 B는 원고를 그냥 올리도록 두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런 명료하지만 정체는 아리송한 메일을 받게 된 것이다.
한숨을 푹푹 쉬던 그때, A가 출근하자마자 B에게 다가온다.
“좋다고 해요.”
“...? 뭘”
“다 봤어요, 메일. 만나겠다고 해요. 아니면 제가 직접 답장할까요?”
“누군지 알고 만나려고 그래?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게.”
“제가 뭐랬어요. 답장 쓸게요.”
“…!”
어딘가 호전적인 자세로, 짤막하게 대답한 A는 사무실 귀퉁이에 있는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커피를 타 온 그는 별말 없이 책상에 앉아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손놀림은 어쩐지 평소와는 달라 보였는데, 조금 신나 보이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ㅇㅇㅇ님.
원문의 작성자이자 공연 비평가 A입니다.
먼저,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B가 참조된, 정확히는 편집부의 일원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메일에 A는 아랑곳 앉고 전송을 눌러버렸다. B는 그저 이 상황을 반신반의한, 정확히는 벙찐 얼굴로 옆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만약 편집장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
(*이해를 위해 마지막 줄 수정합니다..! ㅠ.ㅠ)
삭제한편으로 만약 편집장에게 이 상황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면서.
나는 메일 쓰기 창을 켜놓고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중이다.
삭제아이스 아메리카노 속 얼음은 반쯤 녹아버렸고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책상에 흥건하다.
충동적으로 보낸 메일에 이렇게 쉽게, 그것도 빠르게 답장이 올 줄 몰랐다.
게다가 본인이라니.
나는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메일을 보내버린 것일까.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그렇게 모두에게 다 보여지도록 비판을 하고 싶었냐며 따지고 싶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날카롭게 나를 아프게 하는 말들에 대고 옛날처럼 비난을 퍼붓고 싶기도 했다. 매번 극을 쓰고 해석을 하면서 서로를 성장시켜왔지만 그때의 우리는 정말 지독하게도 서로를 아프게 했다. 몇 번이나 반복된 치열한 토론과 싸움에 무뎌질 법도 한데 우리는 매번을 처음 싸우듯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고도 잘만 화해하고 다시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왜 그땐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을까. 그래, 그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는 게 가장 솔직한 내 마음이지.
'안녕하세요. 답장을 이렇게 빨리 주실 줄은 몰랐는데, 빠른 연락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에 A님이 매거진에 비평을 한 작품의 작가입니다.
솔직한 의견을 듣게 되어 감사한 마음에 무작정 편집부에 연락을 드렸네요.
대사는 달라졌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는 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작품을 지금까지 다 보셨나봐요. 그렇게 유명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고 싶은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
.
.
매거진 편집부 회의실에는 편집장과 디렉터 B가 앉아있었다.
"이게 진짜 작가가 연락이 온 거라고?"
"그렇게 메일이 왔다니까요. 이 작가 이런 거 안하기로 유명한데..."
"아무래도 저번에 쓴 비평이 너무 셌던 거 아니야? 너도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얘기했다며."
"A가 이대로 올리겠다고 했고, 메일에도 바로 답장을 보냈어요. 어쨌든 연락이 왔으니 한 번 만나보면 어떨까요?"
"그럼 정식으로 인터뷰를 가 볼 생각인거야? 단순한 항의라면 회사 이름 들고 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바로 인터뷰 가기에는 좀 그러니까, A한테 사전취재 형식으로 다녀오라고 할게요. 일 안 커지게 조심시키겠습니다."
"그래, 정식 인터뷰 가게 되면 꼭 보고해. 그땐 A도 같이 와서 설명해야할거야. 원가 매체에서 접촉이 어렵고 또 요즘 좀 알아주는 작가니까 만나는거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적대적이지만 않게 잘 하고 와."
"네."
메일을 받고나서 B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어떻게든 상황을 좋은 식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다. 지난 번에도 비평에 대한 항의로 사이가 틀어진 어떤 창작자와의 일로 한참 고생했던 편집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독으로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어필해야만 했다. B는 A에게 정식 인터뷰를 따올 수 있는지, 그 전에 사전취재 형식으로 작가를 만나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개인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을 것을 당부했다.
"알겠지? 편집부 사람들 다 보게 하지 말고 제발 조용히 진행해주라. 적대적이지 않게 잘 하고 오라셔."
"그럴게요.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A는 답장을 보냈다. 단, B의 허락을 받고.
공격의 의도는 없었다는 이야기와 괜찮으시다면 매거진에서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해도 되는지, 가능하다면 사전 취재때 직접 나갈테니 그 때 이야기를 나누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간결하고도 아주 딱딱한 답장이었다.
단 한 문장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늘 한가지 방식의 이별만을 하셨나봐요.
한 번 정도는 붙잡아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메일의 답장을 받고 3일을 끙끙 앓았다. 비평도 아닌 글로 이렇게 칼을 던져대다니. 만난다고 해도 나는 또 이러한 날카로운 말들을 견뎌내야 하는걸까. 그렇지만 마냥 속으로 삭히기에는 그만큼 어른이 미처 되지 못한 나였다.
삭제A의 연락처는 이미 지운지 오래였다. 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으면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 하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눌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속이 답답했다. 그냥 넘겨버릴걸, 후회만 가득했지만 이미 늦었다.
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A에게 하고 싶은 말이 머릿 속에 둥둥 떠다녔다.
우선 컴퓨터 앞에 앉아 메모장을 켜놓고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마치 이 메모장을 A가 보고 있기라도 한듯 키보드 소리가 귓가에 끊임없이 울릴만큼 많은 말들을 퍼붓고 화면을 가득 채웠다. 서운함과 원망, 야속함. 그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말들이 아니었다. 이 글들 가운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답장에 써보일 수 있을지. 실제로 마주하고 눈을 보고서 꺼낼 수 있는 말인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 머릿속을 텅 비우고 싶어서 그냥 그대로 가득 써냈다.
메모장을 그대로 열어두고 메일 쓰기 화면을 열었지만 아무 글도 옮겨낼 수 없었다. 딱딱한 답장조차도 쓸 수가 없었다. 내 글을 잘 알아보는 그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숨기거나 꾸며서 포장할 수가 없었다. 그게 우리가 서로를 아프게 하고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서로의 능력을 탓하는 이유였고, 결국엔 떠나게 한 이유였기때문에.
.
.
.
낯선 메일 주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A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답장이 오래 걸릴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늦는다 싶어서 내가 먼저 연락해.
이건 내 개인 메일이니까 편집부와는 상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 내가 네 작품을 보고 그런 비평을 썼는지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어.
난 그냥 내 일을 한 거고, 너는 여느 다른 작가들이 그렇듯 너의 일을 했을 뿐이지.
그런데 이번에도 내가 너를 힘들게 한 모양이더라.
나는 왜 네가 항상 나의 예외이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너의 인생을 평가한 것도 아니고, 너를 부정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온 마음을 다해 아파하고 나에게 서운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는 너를 좋아했지만 네 글은 좋아하지 않았던 건데 너는 왜 그걸 항상 같은 거라고 동일시하고 네 글을 비판하면 네가 그 비판을 오롯이 다 감당했는지.
그게 우리가 결국은 이렇게 멀리 떨어진 이유였겠지.
내가 다시 네 작품에 대해 글을 쓴 이유는.
나는 아직도 똑같기때문이야.
너의 글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서 그런 비평을 쓴답시고 나름 날카로운 척 문장을 써냈지만. 그런 글을 쓰는 너를 아직도 좋아해.
늘 이별하고 후회하는, 대사만 몇 가지 달라졌을 뿐인 너의 이별 이야기는 도저히 내가 마음을 다해 이해하거나 호평해줄 수 없어.
왜 항상 너와 나처럼 헤어져야 하는지. 멀어져야만 하는지.
네가 작품 속에서라도 행복하길, 웃고 있기를 늘 바래왔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말하고 싶었어. 나름 도박 아닌 도박을 건 셈이야.
내가 쓴 글을 어떻게라든 우연히 보고, 아님 주변 누군가가 너에게 전해줘서 내 글을 보고 나를 찾아주기를 바랐어.
지난 번 메일 마지막 문장. 봤니?
네가 항상 나에게 지적했듯, 난 날카로운 말만 하고 따스한 말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여전히 그래.
그래도 진심을 다해 썼어. 마지막 문장. 내가 너에게,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건넨 진심이야.
기다릴게. '
답장을 써야겠다. 이번엔 답장을 써야 했다. 용기를 내보자.
나도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다른 구성의 이별을, 아니 이번엔 이별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구성의 사랑을 담아낸 글을 써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나에게 건넨 비평, 내가 너에게 건넨 극.
서로가 서로에게 지겹게도 던져왔던 러브레터가 이제서야 가까스로 닿았는지도, 하는 기대를 안고서.
[끝]
메일에 답장이 오지 않는다.
답글삭제지금까지 그래왔듯. 이제는 네가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삭제된 주소라는 반송 메일이 오지 않으니 어련히 그 너머엔 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매일 너에게 일과를 털어놓았다. 사실, 이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니 일과랄 건 없었지만, 네가 혹시나 볼 수도 있으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 존재하지 않는 일상을 털어놓았다.
삭제그렇게 세 달 정도 지나니 소재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지어낸 일상들이 서로 모순을 만들어내던 어느 날, 너에게서 답장이 왔다.
[고마워.]
너무 놀라 짤막한 메일을 수십 번 곱씹어 읽다가 또다시 네가 사라질까 두려워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진짜 너야?]
곧장 다시 답장이 왔다.
[메일 발송이 실패되었습니다.
실패 사유 : 계정 소멸]
너는 그렇게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도망칠 수 있던 유일한 구석까지 앗아가면서.
몇 시간이나 더 지났을까.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건 초침 소리뿐이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네가 빌려주었던 오래된 LP가 생각이 났다. 결국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저 LP.
네 방에서 저 LP의 첫 곡을 듣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불꽃놀이. 온 밤을 비추는 그 불꽃을 보며 사라진다는 건 무엇일까, 너는 그렇게 물었다. 사라진 너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너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떠올렸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책장에서 조심스럽게 LP를 꺼내들려는데, 종이 케이스 사이로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 밤 별똥별이 떨어지면 소원을 빌자.]
그때 문밖에서 엄마가 틀어둔 TV 뉴스 앵커의 흐릿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박혔다.
"오늘 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유성 폭풍'이 예상됩니다. 시간당 수천 개의 유성이..."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방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에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문고리를 열었다.
엄마는 밖으로 나온 나를 잠깐 보더니 이내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8시.. 17분.
삭제"저 유성 폭풍, 언제 볼 수 있대?"
"뭐?"
"뉴스에서 말하는 저거, 언제 볼 수 있냐고."
"왜. 보러 가려고?"
엄마는 비웃는 듯 되묻더니 오늘 10시부터 많이 떨어질 거라고 말했다. 엄마를 지나쳐 LP를 안고 집을 나선 나는 일단 높고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면, 그곳에선 또 너와 연락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들었다.
어딜 가나 북적였다. 사람들은 내 몫의 행복까지 나눠가진 듯한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멀리 달아나기 위해 얼마나 걸었을까.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다르자 도시의 소음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다 흐릿해졌다. 그리고 10시가 가까워져 가는지 도시의 불빛도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짙게 물든 푸른 밤만이 남았다. 어둡고도 밝은 밤이었다.
그때 반대쪽 끝에 한 흐릿한 실루엣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내 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나도 그 소년처럼 뒤로 기대 누워 잔디의 풀냄새를 크게 들이쉬었다. 밖의 세상은 온갖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를 그리워하던 시간만큼 이런 생생함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때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그 광경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내린 불꽃놀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네가 내게 준 LP 커버에는 은하수가 그려져 있었는데, 반짝거리는 글리터가 가득 있는 투명한 LP 판을 하늘 높이 들어보니 당장이라도 유성들이 내게 와서 박힐 것만 같은 압도감을 주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너의 메모를 주섬주섬 꺼내어 소리 내어 읽었다.
"오늘 밤 별똥별이 떨어지면... 소원을 빌자."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내게 고맙다는 짧은 메일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너일까, 너의 가족일까,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닌 어떤 사람일까. 네가 준 메모를 꼭 감싸 쥐고는 이렇게 소원을 빌었다.
'돌아올 수 없다면 어디에 있든지 네가 행복하길. 그리고 나도.'
떨어지는 유성 하나에 너의 이름을 붙이고는 마음에 담았다. 문득 반대편의 소년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져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에 혼자 남았다는 기분이 들자 왜인지 내 방 안에 다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핸드폰에서 지잉- 하고 진동이 울렸고, 익명의 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오늘처럼 하루에 한 번 이 언덕에 오는 거야. 약속해.]
그 소년이 아닐 리 없다는 생각에 왔던 길을 급히 다시 내려갔지만 소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는 그 소년을 마주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리고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성은 여전히 쏟아지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 틈에서 그들의 행복을 조금 나눠가지며, 그저 웃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조각 하나가 심장에 닿아 천천히 녹아내렸다.
[끝]